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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연 Oct 02. 2020

코로나 치료제 관련 통역 이야기

통역사는 어떻게 전문분야 통역을 할 수 있을까?

최근 한 제약회사의 Covid-19 치료제 관련 회의에 통역사로 참석했다. 그간 경력에 제약과 관련된 일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서 솔직히 자신 있는 분야라고는 말할 수 없다. 통역사에게 자신의 전문분야가 있는 것이 제일 좋다고 하지만, 사실 일은 본인의 전문분야와 무관하게 들어오곤 한다. 그렇다면 통역사는 해당 부문의 전문 지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통역을 할 수 있을까?

모든 통역은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해당 통역이 이루어지는 상황과 주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해당 주제에 대해 클라이언트 측에서 어느 정도의 사전 자료를 제공해주는지에 따라 사전 준비를 해야 하는 정도가 달라지기도 한다.  

사전 자료를 많이 제공받는다고 해서 통역 준비에 소요되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은 결코 아니며, 상황에 따라 사전 자료가 아예 없기 때문에 준비에 소요되는 시간이 몇 배나 더 많이 걸리기도 한다. 사전 자료가 없는 경우 공부해야 하는 범위가 광범위해지기 때문에 구글에 걸리는 모든 관련 자료들을 다 찾아보는 상황까지 생기게 된다.

통역사 입장에서 사전 자료가 있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다. 공부해야 할 범위를 어느 정도 한정 지을 수 있으며, 통역 시 나올 수 있는 대화 주제들을 미리 예상하고 그에 필요한 용어 (glossary)등을 정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최근 통역에서의 주제는 해외 제약회사와 국내 제약회사 간 이루어지는 협상이었다. 첫 회의는 법률 문서의 각 조항을 살펴보며 각 기업의 의견을 나누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이어진 후속 회의는 가장 첨예한 문제가 되었던 조항 중 하나를 바탕으로 국내 기업의 담당 회계사를 모시고 회계 반영 방식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 주로 이루어졌다.

클라이언트 측에서 정말 감사하게도 회사의 IR자료와 계약서, 계약서 검토 내용 등을 모두 정리해서 보내주셨다. 첫 회의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했던 것은 계약서 검토 내용이었지만 어느 정도 여유롭게 준비할 시간이 있어서 회사의 IR 자료도 상세하게 공부했다. Covid-19 치료제에 대한 내용이라 제약 부문과 관련된 전문 용어가 많았고, 이를 엑셀에 정리했다. 빈도가 높은 용어는 따로 표시해 두었다. IR자료를 보는데 정말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고, 꼬박 하루 반 정도를 공부한 후 계약서를 다룰 수 있었다. 사실 회의 핵심 내용은 계약서였지만, 계약서를 공부하기 이전에 이 치료제가 어떤 치료제인지, 타 치료제와 구분되는 특성은 무엇인지 등을 알고 있어야 더욱 수월하게 통역을 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정말 시간이 없는 경우, 핵심 자료만 습득할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건 회의를 망치지 않는 것이니, 그 날 다룰 주제에 대해서만 완벽하게 공부해도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상황이 생길지 예상할 수 없으니 되도록이면 최대한 넓게 공부를 해두고, 정말 핵심적인 내용은 통역 직전까지 반복해서 보는 편이다. 

시간적 여유가 있는 경우 엑셀로 glossary를 정리한다

꼬박 하루 반을 치료제에 대해 공부했고, 적응증, 급성 이식편대 숙주병, 만성 골수 단핵구성 백혈병, 사이토카인 폭풍, 긴급사용승인, 임상시험용 의약품 등 평소에 다룰 수 없었던 용어들을 숙지하고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해당 회의에선 모든 용어들이 다 나오진 않았지만 EUA(긴급사용승인), hypoxia (저산소증) 등 미리 공부하지 않았으면 알 수 없었던 용어들이 빈번하게 등장했다.


회의에 핵심 쟁점이 되었던 계약서는 클라이언트 측에서 정말 정리를 잘해서 제공해주셨기 때문에, 리뷰 내용을 한 번씩 정리하고 국문 계약서 내용 중 국문으로 적어주신 질의 사항을 영어로 sight translation 하는 방식으로 공부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당 기업에 대한 기사들을 찾아보고 회의실로 향했다.

약 2시간 동안 쉬지 않고 진행된 회의에서 다루어진 내용은 예상했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클라이언트 측에서 보내주신 자료보다 조금 더 광범위하게 공부를 했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고 통역을 잘 마칠 수 있었다.

클라이언트 측에서 만족했다고 하셔서 후속 회의까지 맡게 되었고, 그 주제는 회계 분야였다. 약간의 사전 지식이 있는 분야여서 덜 부담스럽게 준비할 수 있었다. 그래도 기본적으로 회의에 나올 수 있는 손익계산서 용어를 정리하고, 이전 회의 내용을 다시 검토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무래도 한 번 맡았던 통역이기 때문에 덜 긴장하고 임할 수 있었고 이 날 통역 역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가끔 통역사에게 사전 자료가 필요하냐며 묻는 클라이언트가 있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우리가 의학 전문 용어나 법률 문서를 100%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듯이, 제2외국어를 아무리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통역사라 한들 익숙하지 않은 분야라면 당연히 언어 사용에 큰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주제에서 자주 사용되는 용어, 약어 등을 미리 숙지하지 않으면 결코 명쾌한 통역을 할 수 없게 된다.

통역사에게 충분한 자료가 주어지고, 전문 분야에 대해 집중적으로 공부해서 준비할 시간만 주어진다면 통역사가 해당 부문의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통역을 수행할 수 있다. 전문 분야 통역은 항상 긴장되는 영역이지만, 그만큼 공부하며 배우는 것도 많기 때문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굉장히 감사한 일로 생각하며 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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