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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연 Aug 19. 2021

공시 보고서 번역에 대한 소고

무한책임이 두렵지 않은 번역가가 되고 싶다

프리랜서로 번역일을 하면 정말 다양한 텍스트를 다루게 된다. 자막, 법률문서, 발표자료, 광고 문구 등. 모두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바꾼다는 공통점을 제외하곤, 사실 접근법도 다 조금씩 다르고 이에 따른 번역가의 역할과 개입 정도도 조금씩 달라지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번역가로서 최소한의 개입이 요구되고 이에 따른 유한 책임만 지는 종류의 번역을 선호하는데, 사실 아무리 유한책임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정도만 다를 뿐, 번역가에게는 '무한책임' 이 주어질 수밖에 없다. 



1. 눈에 보이는 업무 성과


공시 보고서나 법률 문서는 정말 있는 그대로를 1:1로 번역하면 되니, 어떻게 생각해보면 정말 마음이 편하다. 내용을 한 번 비틀거나, 그 이면에 있는 의미를 해석해야 할 필요가 없으니 정확한 용어를 빠르게 생각해 낼 수 만 있다면 그만큼 번역 속도를 끌어올릴 수 있어서 한눈에 번역 효율성이 보이는 분야다. 광고 문구와 같은 번역은 정말 간단한 문장을 번역하는데도 며칠이 걸리기도 하는데, 

<1> 국문/영문 모두 원문이 전하고자 하는 언어의 결을 제대로 살리고 있는지 

<2> 언어유희가 들어간 경우 이를 다른 언어로 충분히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는지 

<3> 원문이 함의하고자 하는 분위기를 번역 문구 역시 충분히 잘 표현함과 동시에 너무 늘어진 (풀어서 설명하는) 표현이 광고 문구의 간결함을 해치지는 않는지

를 고려하며 번역하다 보면 한 문장을 붙잡고 며칠을 고민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광고 문구를 번역하면 반드시 원어민에게 감수를 받고, 의견을 물어보는 과정을 거친다. 이렇게 오랜 시간 고민한 번역이지만, 그 성과를 측정하기 가장 쉬운 척도인 '번역량'으로 번역사의 노동력이 환산되지 않으니 사실 좀 억울할 때도 많다. 


공시보고서는 어떻게 보면 정답이 있는 번역이라 그냥 정해진 틀에 원문을 끼워 넣으면 되는 형식이라 내가 내용만 잘 이해하고 있다면 그렇게 어려운 번역은 아니다. 한 문장을 쥐고 뇌의 뉴런을 쥐어짜야 하는 문학/광고 번역은 노력하는 정도에 비해 일한 성과가 눈이 보이지 않아 답답하지만 이렇게 답이 정해진 번역은 빠르게 타이핑을 할 수 있고, 투자한 시간에 대비한 업무 성과가 한눈에 보이니 좋다. 


2. 제한된 개입, 유한한 듯 무한한 책임

번역사의 개입이 제한적이라 감히 끼어들 공간이 없는 것 같지만, 용어의 판단은 보고서 전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지분법 이익/ 코로나에 따른 간편법 적용/ 종속기업 / 연결회사 등 원문에 있는 용어 자체가 함축적이고, 이에 대응되는 여러 개의 영문 용어 옵션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정답'에 가까운지를 판단하는 것은 결국 번역가의 몫이다. 이렇게 번역가에게 책임이 주어지는 순간은 내가 내 몫을 다 한다는 기분이 들어 뿌듯하게 느껴지지만, 나의 판단으로 이 번역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그만큼 그 책임이 무겁게 다가온다. 


간편법 적용은 코로나 발생 이후부터 발행된 보고서들에 자주 보이는 용어인 것 같은데, 이와 완전히 상응하는 영문명을 찾기가 힘들었다. 시간이 조금 넉넉하게 주어졌다면 SEC 보고서도 많이 찾아봤겠지만, 그렇게 공부하면서 번역할 시간이 주어지진 않아서 겨우 practical expedient로 번역된 사례를 몇 개 찾아볼 수 있었다. 


[실무적 간편법으로, 리스 이용자는 코로나19의 직접적인 결과로 발생한 임차료 할인 등이 리스 변경에 해당하는지 평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매출채권 및 기타 채권에 대해 연결회사는 채권의 최초 인식 시점부터 전체 기간 기대 신용손실을 인식하는 간 편법을 적용합니다.]


개인적으로는 practical expedient가 직역에 가까운 표현이라는 판단에 simplified method를 옵션에 두고 있다가 납기 전에 simplified method로 통일을 했다.


운용보수 / 운용성과보수가 대비되는 표현으로 나왔는데, 운용보수는 결국 자금 운용에 대한 대가로 management fee가 맞지만, 운용성과보수는 결국 운용에 따른 '성과'에 대한 보상이라는 의미로 performance fee 가 맞는 표현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운용성과보수는 management performance fee라고 해야 하지만, 이러한 표현은 영문표현으로 존재하지 않고, 국문으로는 '운용'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지만, 과감하게 이를 삭제하고 performance fee로 가야 맞다는 판단을 하기 까지가 쉽지는 않았다. 


표에서 튀어나온 기초 / 기말 이란 단어는 어떻게 번역을 할까 잠시 고민을 했는데, 생각해보니 그냥 beginning balance / ending balance 였다. 회계에서 너무 자주 나오는 표현인데, 다소 불친절한 '기초'라는 단어를 보고 '기초 잔액이라는 표현이니까 beginning balance 가 맞겠구나'라고 생각하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렸다. 


3. 결국은 공부


유상증자도 굉장히 고민한 단어인데, secondary offering 은  [a large number of shares of a public company are sold from one investor to another on the secondary market. In such a case, the public company does not receive any cash nor issue any new shares.]인 것으로 봐서 우리가 흔히 아는 주식을 추가로 발행해서 자본금을 늘리는 의미와는 거리가 좀 있는 단어 같다. capital increase by issuing new stocks라고 풀어쓰면 해석은 쉽지만, 회계 계정에 저렇게 긴 표현이 들어가는 것은 본 적이 없다. 네이버 사전에서는 유증을 recapitalization라고 표현하는데, 구글에 검색한 결과 [Recapitalization is the process of restructuring a company's debt and equity mixture, often to stabilize a company's capital structure.]로, 우리가 아는 유증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recapitalization 이 쓰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SEC에서 증권보고서를 찾아보니 public offering of common stock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증자를 통해서 자본금을 늘린다는 의미보다 '공모'라는 의미에 더 무게가 실린 것 같다. 회계 계정에 public offering of common stock 이란 표현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결국 additional paid-in capital이라고 번역했다. 유상증자로 이렇게 오래 고민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이 단어 하나를 번역하기 위해 몇 년 전 공부했던 먼지 쌓인 수험서를 뒤적거리고, 혹시나 싶어 필기했던 노트들을 한참 읽어보기도 했다. 과거 흔적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부채비율은 단어 그대로 debt ratio 가 아닌 debt-to-equity ratio 가 올바른 표현이었고, 자본 비용은 capital cost가 아닌  cost of capital로 굳어진 표현이다.


몇 년 전 공부할 때만 하더라도 갑자기 튀어나온 회계용어라 할지라도 이게 재무제표 어느 부분에 해당되는지, 그리고 이게 손익계산서에서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머릿속에서 대강이나마 그려지곤 했었는데 이번 번역을 계기로 '정말 끊임없이 갈고닦지 않으면 계속 후퇴할 수밖에 없구나'라고 다시 한번 느끼게 됐다. 그래도 책을 보니 어렴풋이나마 기억이 나는 게 다행이다. 번역가에게 주어진 '무한책임'을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내가 많은 지식을 습득할 수 밖에 없다. 


4. 그리고 중요한 건 실무


사실 실무만큼 효율적인 실력 향상 방법도 없다. 거의 70장 남짓한 공시 보고서를 번역하는 5일 동안 Financial Reporting and Analysis 책 한 권을 다 훑어보게 됐고, 비슷한 회사의 연결재무제표 분기보고서 다섯 개를 정독했고, 평소 들어갈 일 없는 EDGAR에서 증권발행 보고서를 찾아서 평소라면 절대 읽을 수 없는 빠른 속도로 훑었다. 아무리 열심히 5일 동안 공부를 한다 해도, 이 정도의 강도로 회계와 독해 공부를 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내 이름을 걸고 책임져야 하는 업무가 주어졌고, 이에 따른 납기일이 정해져 있기에 평소라면 할 수 없었던 강도의 집중력이 발휘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었다. 결국 빠르게 실력을 높이기 위해선 이렇게 강도 높은 실무 경험을 계속 쌓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한 분야에 대해 깊이 있는 지식을 단기간에 흡수하고 나면 큰 자극을 받는다. 더 열심히 하고, 잘하고 싶다는 의욕도 생긴다. 오랜만에 회계 공부를 한 김에 그동안 조금 멀리 했었던 금융 서적들을 집중해서 읽어내 봐도 좋을 것 같다. 이 내용으로 통역한다는 기분으로 공부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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