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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연 Oct 03. 2021

모든 곳에 속하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깊고도 얕은 관계

올해 초부터 주기적으로 통역을 하게 된 한 회사가 있다. 처음 통역을 했던 부서에서 감사하게도 다른 부서에 계속해서 소개를 시켜주시면서 해당 회사의 여러 부서에서 통역을 하며 각기 다른 주제들에 대해 통역을 하게 됐다. 각 부서마다 맡고 있는 업무는 다르지만 한 회사이다 보니 업무 프로세스나 통역 환경이 거의 동일한 편이라 일이 들어올 때마다 큰 걱정이나 긴장 없이 준비할 수 있는 수준이 됐다. 특히, 이 회사에서는 통역 관련된 자료를 바로 전 날 밤에 보내는 경우도 굉장히 많은데 이러한 환경에도 이젠 꽤 익숙해져서 자료를 정말 급하게 받게 되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됐다.


얼마 전 했던 통역도 예상했던 대로 회의 전날 밤이 되어서야 자료를 받을 수 있었다. 통역 의뢰를 받은 것은 일주일 전이어서 나름 일정을 비우고 조정할 수 있는 시간은 있었다. 하지만 자료가 없어서 미리 공부를 해둘 수는 없었지만, 늦게 받겠거니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충격이 크진 않았다. 그냥 차분하게 마음을 비우고 자료를 받은 시점부터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준비했다.


처음 이 회사에 통역을 하러 갔을 때는 제안서 발표와 그에 따른 질의응답을 통역했다. 제안서 발표와 질의응답 모두 순차통역으로 진행되었으며, 회의의 포커싱은 거의 질의응답에 맞춰져 있었다. 최근 두 번 했던 통역에서는 아예 제안서 발표를 맡게 됐는데, 순차통역으로 진행하면 그만큼 회의 시간이 늘어지기 때문에 시간을 단축할 수 있어서 좋지만 그만큼 나 자신이 통역사 겸 발표자가 되는 셈이라 사실 마음의 부담이 조금 커지기도 했다. 


통역사는 철저히 외부인이다. 하지만 회사의 중요한 핵심 문서나 회의를 번역하고 통역하게 된다. 중요도가 떨어지는 회의나 문서에 굳이 회사 비용을 처리해가면서 통역사를 쓸 가능성은 적다. 그만큼 내부 인력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회의나 문서를 외부인에게 비용을 내며 그 업무를 대신하여 맡기는 셈인데, 통역사는 외부인인 만큼 그 회사의 자세한 내부 사정이나 정보에 대한 접근권을 얻기가 어렵다. 인하우스 통역사가 아닌 이상 프리랜서 통역사가 회의 직전에 흡수할 수 있는 자료의 양은 클라이언트가 제공한 정보 정도에 한정되어 있고, 그 이상의 내부 사항은 알기가 어렵다. 


통역사이자 발표자로서 회의에 참석한 이 날은 그만큼 어느 정도 긴장이 될 수밖에 없다. 말만 전달하면 되는 통역사이지만, 내 발표를 듣고 상대방 측이 이 회사와 계약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 자리인데 과연 '외부인인 내가 이런 발표를 해도 되는가'에 대한 생각에 그 책임감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그래도 몇 번 일을 했던 회사이기 때문에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 정말 우리가 이 일을 수주하면 좋겠다' '우리가 이렇게 뛰어난 회사랍니다'라는 생각으로 나 자신이 회사의 직원인 것처럼 생각하고 발표했다. 


질의응답 부분에서 비용과 관련된 지적이 나왔을 때 해당 비용 도표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질문을 이해하고 대답하는데 조금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아마 이 부분은 대외비이기 때문에 외부 공개가 어려워서 직접 전달받지 못한 것도 있을 것 같다. 방금 전까지 '내 회사'라는 생각으로 제안서를 발표했지만, 내가 모르는 사항에 대한 질문을 듣자마자 바로 나는 철저한 '외부인'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통역사들이 통역할 때 가장 어려운 부문을 '질의응답'으로  꼽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관련 자료를 열심히 습득했다 하더라도 외부인으로서 맡은 기업의 세밀한 내부 사항이나 정보까지 정확하게 습득할 수 없는 노릇이다. 통역사보다도 회의 내용에 더 깊은 지식이 있는 질문자가 던지는 질문을 통역사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고, 그에 대한 사측의 응답 역시 통역사가 완벽하게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질의응답 세션이 시작하면 어떤 질문이 나올지에 대해 바짝 긴장을 할 수밖에 없다. 


또한 대부분의 회사는 통역사라 할지라도 대외비 정보 공유를 꺼리는 경우가 많다. 정말 보안이 심한 곳은 회의 직전까지 자료를 공유하지 않는 곳도 있는데, 이런 경우가 가장 스트레스다. 자료를 어느 정도 읽어보고, 계속해서 등장하는 주요 용어를 글로서리로 정리해 놓아야 통역을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는데, 외부인에게는 원칙적으로 정보 공유가 어렵다는 답변을 받으면, 혹시 용어가 익숙하지 않아 통역에 실수가 생길 경우 이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통역사가 져야 한다는 것은 정말 큰 부담일 수밖에 없다. 


통역사가 내부인이 되어 회사의 얼굴이 되고, 제안서를 발표나 회사 소개를 하는 등 중요한 업무를 맡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회사에 대한 세밀하고 기밀한 사항까지 잘 알고 있지는 못한다. 통역사는 철저한 내부인이자 외부인이다. 어디에든 속하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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