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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선 Sep 22. 2020

낯선 여행지에서 혼자 공포의 밤길을 걸어보았다

<웰컴 투 삽질여행> 제가 지금 공포영화 속을 걷고 있나요?

<웰컴 투 삽질여행>

제가 지금 공포영화 속을 걷고 있나요?



한 여성이 어두운 밤거리를 혼자 걸어가고 있다. 음산하게 깔리는 BGM. 여성의 눈빛은 불안으로 흔들리고 있다. 천천히 내딛는 발걸음. 그리고 갑자기 사라진 사운드. 숨 막히는 적막.

“꺄아아아아악!”

여성은 갑자기 나온 의문의 무언가로부터 습격당한다. 

어두운 낯선 길을 혼자서 걷는 여성은 공포영화 속 뻔하디뻔한 클리셰다. 사망 플래그를 알아채라고 대놓고 깔아놓은 수준이다. 이런 장소에 실제로 혼자 떨어져 걷고 있다면? 오줌 지릴 만큼 무섭지 않을까? 이런 상황은 애초에 피하는 게 좋다. 사고를 당하지 않더라도 심적으로 매우 안 좋다. 밤거리를 엄청 무서워하는 편은 아니지만, 여행 중 밤거리를 불필요하게 혼자 걷는 일은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했었다. 그런데 내가 망각한 것이 있었다. 내 기준의 밤거리는 잠들지 않는 나라 ‘대한민국’의 ‘밤거리’였다는 것을.     


몰타에 머무는 동안 피렌체 여행 계획을 짜던 중이었다. 항공권 정보를 검색하던 도중 기가 막힌 비행기 한 편을 발견했다. ‘몰타-피사’ 편도 구간이 33.65유로에 가능하다고? 우리 돈으로 약 4만 4천 원 정도에 이탈리아 피사로 가는 티켓을 발견한 것이다. KTX 타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비용보다도 훨씬 싸다. 피사의 사탑이라는 유명한 관광지도 있는 데다, 피렌체까지는 기차로 1시간이면 이동할 수 있는 거리였다. 이거다! 저렴한 티켓을 발견한 나는 환호하며 비행기 시간을 확인했다. 20시 35분 몰타 출발, 22시 25분 피사 도착. 음, 그렇게까지 늦은 시간은 아니군. (이게 늦은 시각이 아니라는 사고부터 한국인의 기준이었음을 훗날에야 깨달았다.) 더군다나 지도로 확인해보니 도시 자체가 워낙 작아 공항에서 따로 버스를 타고 이동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얼마나 가깝냐면 피사에서 ‘공항-숙소-관광지-숙소-기차역’ 구간을 걸어서만 다녔을 정도다. 대충 공항에서 걸어서 갈 수 있을 만큼 가깝고 저렴한 호스텔을 하나 잡아두었다. 1박에 고작 18유로였다.     


피사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두리번거리며 혹시라도 유심을 파는 곳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워낙 코딱지만 한 공항인 데다 시간까지 늦어 그런 게 있을 리가 만무했다. 유심은 포기하고 해가 밝으면 시내에서 해결하든가, 피렌체 기차역에 도착해서 해결하기로 스스로와 합의했다.

공항에서 와이파이를 연결한 뒤 숙소까지 가는 길을 체크했다. 기다란 길로 진입해서 여덟 번째 오른쪽 골목 오케이! 지도를 보니 근처에 건물도 많아 보이고, 편의시설도 있는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사람들이 꽤 오가는 길이겠지. 숙소까지는 도보로 10분 걸리는 정도. 이 정도는 와이파이 없이도 걸을 수 있어! 씩씩하게 공항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1차 당황했다. 그냥 시커먼 주차장과 하늘밖에 안 보여서….

“하하하, 많이 어둡네!”

공항 밖에는 애초에 사람이 거의 없었다. 자연스럽게 나선 지 1분 만에 혼자가 되었다. 아니, 이렇게까지 적막할 일이야? 그래도 지도 보는 데는 자신이 있는 편이라, 외워둔 길까지 당당하게 걸어갔다.

‘뭐! 배낭 메고 밤길 걸어가는 아시안 여자 처음 보냐?’

한껏 센 척하며 걷고 있지만, 서서히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일단 중심이 되는 길로 들어섰는데, 내가 상상했던 길과 완전히 달랐다. 지도만 보고 나름대로 상권이 형성된 곳인 줄 알았는데 그냥 주택가였다. 가로등조차 매우 드문드문 켜져 있었다. 11시면 다들 잠드는 동네인지 주택의 불도 대부분 꺼져 있었다. 각 잡았다. 이거, 서양 공포영화 속 한 장면 같잖아!!!

길거리에는 사람이 없었다. 시커먼 주택가를 아시안 여자 혼자 걷고 있다. 심지어 누가 봐도 ‘나 초행길이에요’ 티내는 커다란 배낭을 메고. 와하하, 이거 미치겠네! 누가 나와서 나를 공격해도 도움 요청할 사람 한 명 없을 것 같잖아! 제발 나 말고 한 명이라도 더 있었으면! 이렇게 생각한 순간 옆에서 사람 한 명이 걸어갔다. 으악! 놀래라! 금방 한 말 취소! 차라리 인간은 아무도 없는 게 나아! 나 혼자 걷게 해주라!   

  

길을 걷는 동안 인간 두 명, 고양이 한 마리, 차 한 대와 마주쳤다. 그때마다 흠칫 놀라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 와중에 정신 팔고 발걸음만 빨리하다 보니, 지금 걷는 길이 몇 번째 골목인지 까먹고 말았다. 주위에 호스텔이 있을 분위기도 아니었다. 심지어 나는 이미 보고 왔다. 숙소 예약 사이트 후기에 ‘입구 찾기가 더럽게 어렵습니다’라고 적혀있었던 것을.

“아, 뭣 됐다.”

사이코패스처럼 활짝 웃었다. 다시 첫 번째 길로 되돌아가서 1부터 다시 세야 하나. 공포에 정복당할 것 같았다. 이 길을 되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가라고요? 신이시여….

다행히 신이 나를 완전히 배반한 것은 아니었나 보다. 눈물을 머금고 일단 스마트폰 지도를 다시 열었다. 놀랍게도 아까 잡힌 GPS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오오, 감사합니다. 아무 신이나 좋으니 제 감사의 인사를 받아주세요. GPS는 미리 잡아두면 와이파이 유무와 상관없이 쓸 수 있다더니! 모르던 기능이 운 좋은 타이밍에 강림하셨다. 최신 무기를 손에 넣은 것처럼 다시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나 여행 초짜 아니거든? 나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이거든?’

그래도 두려움이란 감정은 그대로였으므로, 당당한 척 걸어 나갔다는 말이 옳겠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거긴 너무나도 공포영화 속이었으니까. 내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게 생겼으니까.     


“어라, 왜 없지?”

지도를 확인해보니 GPS가 내 목적지를 이미 지나친 후였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

GPS와 목적지가 정확히 위치하는 곳에 서 있는 나. 그리고 전혀 호스텔이 보이지 않는 나. 아니, 마법사들만 찾을 수 있다는 9와 4분의 3 승강장도 아니고 이런 동네 구석에 있는 호스텔 입구를 못 찾는다고? 이때쯤 그분의 말씀이 다시 떠올랐다. 

‘입구 찾기가 더럽게 어렵습니다.’

귀한 시간을 내 타자기를 두드려주신 분의 말씀을 더 잘 들었어야 했는데….

내 GPS는 두어 번 왔던 길을 반복했다. 지도에 잘못 찍혀있는 거 아냐? 어떻게든 기필코 찾아낸다는 의지로 골목 안쪽까지 들어가 보기로 했다. 휑한 구역 안으로 들어가니 드디어 ‘호스텔’이라고 조그맣게 적혀있는 문을 발견했다.

‘아, 이런 데 문이 있으니까 못 찾지!!!!’

길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곳. 도저히 뭔가가 있을 것 같지 않게 교묘히 숨겨놓은 느낌이었다.


그날 밤, 힘겨운 체크인을 마치고 안락한 꿀잠에 성공했다. 싼값 치고 큰 목욕실도 좋았고, 해도 뜨기 전에 같은 방을 이용한 이들이 모두 나가버려 편안한 아침을 맞이했다. 숙소에 머무는 동안 다시 만난 와이파이도 너무 반가웠다. 밖으로 나가면 다시 휴대폰은 무용지물이지만. 이날은 아침 일찍 피사의 사탑이 있는 두오모 광장까지 걸어갔다 올 예정이었다. 점심에는 피렌체로 향할 예정이었으니까.     



6월의 햇살은 아침부터 쏟아져 내렸다. 어젯밤 나를 두렵게 했던 밤거리를 다시 나섰다. 아침이니 그리 무섭지는 않겠거니 하며. 그런데, 세상에.

“이렇게 아름답고 평화로울 수가.”

간밤에 나를 공포로 옥죄었던 마을은 한적함 그 자체였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평화로웠다. 한적함이라는 단어를 형상화한다면 딱 이 모습일 것 같았다. 괜찮다면 이 마을에서 심심할 때까지 늘어지고 싶었다. 주황빛 지붕의 주택들은 주인의 정성이 담긴 정원을 뽐내고 있었다. 정원에는 귀여운 소품이며 화려한 꽃들이 놓여있었고, 때때론 강아지가 나와 토스카나의 햇볕을 즐기고 있었다. 어젯밤 나를 공포로 몰아넣은 것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 거지. 세상에, 태양의 존재가 이렇게 한 동네의 인상을 바꿔놓을 수 있는 거구나. 공포영화 속에서 살던 동네 주민들이 단 몇 시간 만에 부러워지다니.     


아직도 그 밤거리를 생각하면 공포영화 같았다는 묘사 외에 다른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그대로 누군가가 나를 끌고 사라져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으니까. 이후 ‘혼자서 밤 비행기는 피한다’라는 여행 공식을 만들었다. 돈 좀 아끼겠다고 내 목숨 내놓을 순 없지 않은가. 그래도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더라. 한 달 뒤, 프라하에서 돈 아끼겠다고 밤길 걸어가다가 비슷한 실수를 반복했다. 미쳤지, 내가 진짜. 이번에도 지도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자만심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그래, 갈 수는 있겠지. 다만 그 길이 시커먼 어둠 속일 뿐. 혼자서 공포 속에 남겨지는 경험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으니, 밤길 앞에선 그저 겸손하게 살아야겠다.





* 이 글은 <웰컴 투 삽질여행>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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