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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혜나 Feb 21. 2024

달달하고 쓸쓸한, 쓸쓸하고 달달한

 유골함을 들고 희진이 살던 원룸을 찾았다. 빛이 들어오는 구멍이라곤 작은 창 하나가 전부인 소박한 방이었다. 손을 뻗으면 창 밖으로 보이는 맞은편 건물에 손이 닿을 것 같았다. 그 창가에 작은 스킨답서스 하나가 주인이 사라진 걸 아는지 기운이 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가게에 있는 커다란 아레카 야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희진의 눈빛이 생각났다. 화분을 싱크대로 옮겨 물을 흠뻑 주고는 그녀의 소지품들을 살폈다. 열권이 넘는 일기장이 조그마한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가장 왼쪽에 세워져 있는 일기를 꺼내 맨 뒷장의 일기를 읽어 보았다.      


2021. 10. 31
진희 언니의 케이크는 정말로 맛있다. 조금 더 여유가 있었다면 더 자주 가서 먹었을 텐데…. 초코케이크값만 아껴도 돈을 훨씬 빨리 모을 수 있을 것 같다. 진희 언니는 언제나 내게 따뜻하다.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그런 따뜻한 눈빛이 처음에는 낯설고 부담스러웠는데 지금은 언니의 그런 눈빛이 너무 좋다. 언니는 나를 정말 좋아하는 거겠지? 다시 상처받을 일은 없겠지? 양양에 가기 전에 언니 가게에 한번 들르고 싶었는데 게으름을 부리다 시간이 다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에릭을 도와주는 일은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 이번에 양양에 다녀오면 제일 먼저 언니 가게에 들려야지.     


희진이 양양으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쓴 일기였다. 가슴이 먹먹해 졌다.

앞쪽으로 가며 쭉 일기를 읽어 내려갔다.      


2021. 8. 2
언니와의 여행은 짧았지만, 너무 행복했다. 언니는 나의 과거를 모르지만 내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를 좋아해 주는 것 같다. 지난밤에 에릭의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었지만, 언니가 있어서 참을 수 있었다. 에릭은 여전히 자기 곁으로 와서 같이 사업을 하자고 말했지만 다시 한번 거절했다. 다시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완전히 끊지는 못했지만, 차차 멀어져서 결국 완전히 끊어내 버리고 약에서 손을 떼야지. 진희 언니를 만난 이후로 왠지 더 잘해 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가 차가 있어서 운전을 할 수 있으면 언니랑 더 많이 여행을 다니고 싶다.     


우리 둘이 양양을 다녀왔던 날에 일기였다. 희진은 그때의 여행이 퍽이나 행복했던 모양이었다.      


2020. 6.13
약을 끊으려 애를 쓰는데 잘 안된다. 약 기운이 떨어지면 기운이 없어지고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술이라도 마시려고 편의점에 가다가 새로 생긴 카페를 발견했다. 손님이 아무도 없었지만 진열된 초코케이크가 너무 맛있게 생겨서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초코케이크는 지금까지 먹어본 케이크 중의 최고였다. 허겁지겁 먹고 보니 기운이 좀 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제야 카페가 보였다. 빈티지한 분위기에 잔잔한 음악, 곳곳에 자리 잡은 예쁜 화초들. 주인 언니가 정성을 많이 들인 것 같았다. 이런 카페의 주인이라. 나도 내 가게를 가져보고 싶은데 그런 일이 내 인생에서 가능할까? 케이크를 다 먹자 주인 언니가 케이크 맛을 물어봤다. 그리고 반짇고리를 가져와 내 소매에서 달랑거리던 단추를 다시 달아줘도 되겠냐고 물었다. 당황해서 머뭇거리자 언니는 괜찮다며 내 손을 잡아당겨 소매 끝에 달랑거리던 단추를 다시 단단히 달아주었다. 아. 왠지 그 카페에 자주 가게 될 것 같다.      


단추 언니.      


 희진의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던 내 이름이 기억났다. 그녀의 소매에 단추를 달아 준 일이 그제야 생각났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희진의 유골이 든 나무상자를 바라보았다. 입을 틀어막고 한참을 울었다. 울다 울다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아도 나는 계속 울었다. 그렇게 온 몸으로 울며 그 밤을 꼬박 지세웠다.       

   


 요즘 카페 앞 거리는 낙엽이 수북이 쌓이고 있다. 틈이 날때마다 쓸고 있지만 낙엽이 떨어지는 속도를 따라 잡을 수는 없다. 돌아서면 어느세 낙엽이 수북히 쌓여있다.

 바스락. 들어오는 손님들은 낙엽소리가 즐거운 듯 행복해 보인다.

 “아이스커피랑 초코케이크요.”

 희진이 매번 앉던 그 자리에 다른 손님들이 들어와 앉는다.   

 “맛있게 드세요.”

 손님 앞에 초코케이크를 내려놓는 나의 미소는 여전하다.

 “사장님, 초코케이크 너무 맛있어요. 저 여기 단골 될 거 같아요.”

 순간 얼음에 닿은 피부처럼 바닥에 발걸음이 달라붙는다.

 “감사합니다, 손님. 자주 오세요.”

 손님을 보고 다시 한번 웃으며 인사한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바닥에 붙은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낸다. 마음엔 쓰라린 생채기가 또 하나 생긴다. 얼음에 붙은 살갖을 억지로 떼어내면 생기는 생채기처럼.

 카운터로 돌아온다. 쇼케이스가 오늘 따라 더 화려하다. 그 안에는 앞으로도 수도 없이 내 발걸음을 멈춰 세우기에 충분한 양의 케이크들이 정갈하게 진열되어 있다.      


 나는 오늘도 여전히 초코케이크를 만든다. 달달하고 씁쓸한, 씁쓸하고 달달한 초코케이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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