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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혜나 Mar 29. 2024

서른아홉 살의 진짜 노동기

시골에다 서점을 차렸지 뭐예요

서른아홉 살이 될 거라고,

 왠지 한 고개 꺾이는 것 같은 마흔을 일 년 앞둔 그 나이가 내게도 올 거라고,

 불과 몇 년 전 까지도 나는 이 사실을 미처 실감하지 못했다.


 서른여덟, 작년 여름. 방학을 맞아 아이들과 제주에서 보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후, 나는 마음을 먹었다.

'그래. 여기. 이 시골 작은 마을에다가 말도 안 되는 서점을 만들겠어!'


 스물넷에 결혼을 했고, 스물다섯에 엄마가 되었다. 서른 하나에 셋째를 낳았고, 서른셋에 세 아이를 데리고 제주로 내려갔다. 그리고 서른여섯, 나는 다시 남편의 직장 곁인 영암으로 이사를 왔다. 본인의 결단이었지만, 온전히 본인의 것일 수만은 없었던 결정으로 인한 이사 후, 나는 이곳에 적응하느라 꽤 오래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사랑하는 애인과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하는 심정처럼 제주를 생각할 때마다 내 마음은 그렇게 아프고, 그립고, 애틋했었다. 그런데 이번 제주 방문은 좀 달랐다. 그토록 좋아했던 눈앞 제주 바다의 모래사장이 액자 속에 걸린 아름다운 사진처럼 느껴졌다. 제주에는 소중한 인연들과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사랑하는 바다가 여전히 그대로 있었으니 제주가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달라진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제주를 떠나기로 결정하기 전, 마지막으로 구상했었던 계획이 아이들 학교가 있는 작은 마을에 시끄러운 서점을 만드는 일이었다. 제주를 떠나며 모든 계획을 중단하고 영암의 시골집에서 조용히, 아주 조용히 살아온 지가 3년쯤. 고독이 나를 어디까지 끌고 가는지, 고독이 이기는지 내가 이기는지 잔뜩 웅크리고 버텨 보던 시간이었다. 결국 고독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내 발아래의 내 삶의 터전이었다. 고독은 내게 제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 하여도 환경 따위가 나의 평안을 좌지우지할 절대적 요인일 수는 없다는 것을 가랑비에 옷 젖듯이 알려주었다. 뿌리를 내릴 비옥한 토양을 찾아 헤매던 내게, 네가 뿌리내릴 곳이 어쩌면 지금 밟고 있는 이 땅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을 슬그머니 머릿속 집어넣어주었다. 비로소 나의 발아래, 이 땅에, 이곳의 사람들과 함께 터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쓰고 보니 엄청 근사한 것 같지만, 사실 결정적인 이유는 유튜브에 나온 장항준 감독의 작업실이었다. 지인들과 모여 와인 마시며 수다 떠는 공간, 그곳에서 오가는 저급과 고급을 오가는 그런 식의 대화들. 나도 그런 공간과 시간들을 너무나 갖고 싶었다.


 몇 달 전, 뭐라도 해 보고 싶어서 둘러봤던 가게자리가 하나 있었다. 10평 남짓 되는 건물에 화장실이 딸려 있었고 막내 태권도 학원 아래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200에 25만 원으로 월세가 저렴했다. 아이들이 많이 오가는 곳이라 분식집을 하기 딱 좋은 자리였지만 나는 기어이 거기다 작은 시골서점을 만들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생각이 많은 듯 하지만 정작 중요한 일을 할 때는 즉흥적으로 삘이 꽂히는 데로 해 버리는 스스로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 불이 붙었을 때 장작을 넣지 않으면 금방 불꽃이 사그라들고 말 거라는 사실도. 마음을 먹은 다음날 주인을 만나 계약을 하고 열쇠를 받아왔다.

 몇 달 만에 다시 들여다본 가게 내부는 내 기억 속의 모습보다 더 엉망이었다. 한쪽 기둥은 시멘트 밖으로 드러난 녹슨 H빔 때문에 붉게 물들어 있었고, 군데군데 뜯어진 벽지와 바닥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좋을지 모를 지경이었다. 당시엔 '어째서 나는 가게를 다시 들여다보지 않고 계약부터 해버렸을까'하며 머리를 쥐어박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또한 우주의 큰 그림이 아니었나 싶다.


 일주일 동안 인테리어 업자들을 불러 견적을 내 보았다. 벽에 페인트를 칠하고 바닥에 데코타일만 깔아도 500만 원이 훌쩍 넘어갔다. 인테리어 외에도 들어갈 돈이 많을 테고, 여기서 서점을 해서 결코  돈을 많이 벌 수도 없을 터였다. 큰돈을 들일수는 없었다. 견적 서핑 후, 답은 정해졌다. 아니 어쩌면 원래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셀프시공. 그 험난한 가시밭 길 하나밖에.

 가장 먼저 냉난방기를 중고로 설치했다. 8월 말이었으니 더위를 피해야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게를 둘로 나누고 있던 나무 미닫이 문을 철거하기 위해 철거아저씨를 불렀다. 저렴한 업체를 찾으려 백방으로 알아보려 노력한 시간이 무색하게 아저씨 두 분은 30분도 안되어 문짝을 철거해서 트럭에 싣고 유유히 사라지셨다.

 이제 정말 혼자 해야 할 일들만 남았다. 가장 앞쪽 칸 페인트 칠을 시작했다. (가게는 크게 세 칸으로 나누어져 있다.)  가장 무난한 아이보리색으로. 첫째 칸은 바닥에 데코타일이 심란하게 붙어있었지만 벽지는 깨끗한 편이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페인트 칠을 할 수 있었다.  천정을 칠하며 이러다 어깨가 돌덩이로 변해 버리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그때까진 이 정도면 할만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문제는 두 번째 칸으로 넘어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심란하게 녹슨 붉은 기둥부터 창틀에서 새어 나온 비 때문에 곰팡이로 얼룩지고 여기저기 벗겨진 벽지, 천장에 물이 샌 흔적까지. 이 위에다 페인트를 바로 칠하는 건 멍청한 짓이라는 것을 앞쪽 칸을 칠하면서 깨달았기에 밑작업을 잘해야 했다. 유튜브로 물이 새고, 결로가 생기는 곳에 어떻게 페인트 시공을 해야 하는지 샅샅이 찾아보았다. 노트에 필기를 하며 혼자서 셀프로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조리 받아 적었다. 실행해야 할 공정들은 이러했다. 먼저 곰팡이가 핀 벽은 벽지를 깨끗이 제거하고 곰팡이 제거제를 바른다. 두 번째로 곰팡이 제거제가 바짝 마른 후 물이 새는 곳에 방수크림을 바르고 말리기를 두 차례 반복한다. 세 번째, 그 위로 결로방지 페인트를 두껍게 두 차례 바른다. 네 번째 벽에 요철이 생긴 부분, 벽지가 뜯긴 부분 등에 핸드코트를 발라 비교적 평평하게 만든다. 다섯 번째 핸디코트가 건조된 후 그라인더를 이용하여 벽을 갈아 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원하는 색상의 페인트를 바른다. 끝.

 가게의 맨 안쪽, 세 번째 칸은 벽에서 페인트가 떨어져 나와 더 엉망이었다. 두 번째 칸의 너덜너덜한 벽지는 커터칼날이 달린 대패로 긁어내고, 세 번째 칸은 표점 무늬처럼 드문드문 떨어진 페인트를 그라인더로 갈아서 백마의 매끈한 가죽처럼 말끔히 벗겨 내야 했다. 그라인더를 사용해 페인트를 갉아 대자 페인트 가루가 날려 앞이 안 보일 정도가 되었다. 전신 방호복을 입고 보호안경과 마스크까지 쓰고 살살 숨을 쉬며 일을 했다. 계속 그렇게 숨을 쉬면 생명에 지장이 있으므로 큰 숨을 쉬러 자주 가게 밖으로 나왔다 들어가야 했다. 밖에 앉아 쉬는 동안 핸드폰을 보는데 액정에 얼굴이 비쳤다. 마스크 안으로 들어온 고운 페인트 가루가 코 주변에 소복이 쌓여 있었다. 닦으려 해 보았으나 끈적거려 잘 닦아지지도 않았다. 순간 맥이 탁 풀렸다. 인정해야만 했다.     

'아. 나는 이거. 완전히 망했구나.'


 처음 예상은 가볍게 내 작업실을 만드는 거였다. 사무실만 하기엔 좀 크니까 서점도 함께 하면 금상첨화다 싶었는데. 지금까지 투입되었고, 앞으로도 투입되어야 할 나의 시간과 노동과 금액은 이미 가벼운 수준을 훌쩍 넘어섰다. 한 달, 넉넉 잡아 두 달이면 다 끝나겠다 싶었던 공사가 몇 개월째 거북이처럼 진행되고 있었다. 여름 막바지에 공사를 시작했는데 어느새 밖엔 찬바람이 불었다. 이 정도 투입을 하면 수익이 괜찮은 가게가 되어야만 할 것 같았다. '시골인데. 서점인데. 그런 가게가 될 것 같지는 않은데.' 망한 것이 틀림없었다. 지금이라도 관둬야 하는 건지. 나는 심각해졌다.

 그날 이후, 한동안 작업을 멈추었다. 투입과 결과에 대한 머릿속 계산기를 아무리 굴려봐도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지금 멈추면 그간 투입된 노동과 물질, 나의 시간, 그리고 일 년 치 월세가 날아갈 터이고, 계속 일을 해서 마무리하면 더 많은 노동과 물질, 시간이 투입된 후 결과는 보장할 수 없었다. 일에 대해 찬찬히, 꼼꼼히 따져보지 않고 저지른 과거의 내가 원망스러웠다.


 손을 놓은 지 보름쯤 되었을까.

 나는 다시 작업복을 입었다. 고민 끝에 내가 내게 줄 수 있는 답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실패를 해도 완벽하게 실패하자. 그럼 완전히 마무리했던 경험 하나는 내게 남을 테니까.'

 지금 중단하면 어중간한 실패의 추억만 내 안에 남을 것 같았다. 이 노력을 들여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건 너무 억울한 일이라 생각했다. 돈으로 돈은 못 벌어도 돈으로 경험은 살 수 있으니 거기에 투자하기로 했다.

 그렇게 다시 가게로 돌아와 공사를 시작한 이후로 해가 바뀌고, 겨울이 다 지나가도록 작업은 계속되었다. "서점 준비 잘 되고 있어요?"하고 주변 사람들이 물을 때면 사람 좋은 미소로 허허 웃었지만, '이게 도대체 맞는 것일까.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고민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작업복을 다시 입은 그날 이후로도 나는 말도 못 하게 흔들렸다. '이쯤에서 그만하자.' '가게 말고 그냥 사무실로만 쓰자.' '수요도 없는 공급을 너는 왜 하려 그러는 것이냐.' 등등등. 나를 흔든 질문은 수도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나를 많이 흔들었던 질문은 다름 아닌 내 나이에 관한 것이었다.

 '너 곧 마흔이야. 그거 알아?'

아이를 키우다 서른을 맞이했던 나는 급류를 타고 흘러와 버린 것 같은 나의 이십 대가 매우 아쉬웠고, 막연히 마흔이 되면 사회에 굳건한 내 자리 하나쯤은 마련되어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었다. 그런데 마흔을 코앞에 둔 지금, 나는 완벽한 실패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었다. 만 39세를 기준으로 삼은 국가의 온갖 청년 지원 청책은 내 엉덩이를 자꾸만 걷어 차고 있었다. '좀 있으면 너는 더 이상 공식적인 청년이 아니야. 이제 지원사업도 받기 힘들 텐데 어쩔래? 청년의 날들을 이렇게 허비할래?' 그때마다 나는 매번 내게 스스로 답해 주어야 했다. 답하는 나도 떨리지만 확신을 가진양 굳건한 목소리로 내가 내게.

'나는 지금 내가 뿌리내릴 토양을 만들고 있는 거야. 땅 만들기는 원래 제일 어려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게 진짜 노동이야.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했지? 그거 봐봐. 난 오늘도 성공한 하루를 살아 낸 거야.'

  

 겨울의 끝자락에 나는 마침내 서점을 오픈했다. 묵묵히 해 온 노동이 구석구석, 덕지덕지 붙어있는 이곳에 앉아 있자면 까치발로 간신이 발가락 몇 개만 딛으며 걸어온 것 같은 세상에 비로소 온전히 발바닥을 다 내려놓을 수 있는 공간 하나가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건 마치 앞으로 내 세상을 조금 더 넓혀도 될 것 같은, 조금 더 큰 실패로 달려가 봐도 될 것 같은, 그런 용기가 생기는 기분이랄까. 시골에 이런 공간이 너무 필요했다고 말하며 책에 흠뻑 빠져 좋아하는 손님들을 만나고, 애써 만든 공간이 여러 모임들로 살뜰하게 쓰이는 걸 보면 기분이 너무나 좋은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투입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합에 비해 산출된 수익이 얼마냐 되느냐를 따진다면 나는 이번에 완전히 실패한 게 분명하다. 그러나 산출량에다 수익 플러스 보이지 않는 것의 합까지 더한다면 나는 사실 이번에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매일매일, 뚜벅뚜벅, 그렇게 걸어가다 보면 뭐가 돼도 된다는 사실. 내가 뿌리내릴 토양을 만드는데 에너지를 사용한다 해도 세상에 별 큰일이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현실. 그리고 실패하기에 오늘만큼 젊은 날은 없다는 진실까지. 이 모든 걸 어떻게 물질적 수익과 비견할 수 있을까.

 서점 한편엔 지금도 작업 내내 입었던 페인트로 얼룩덜룩한 점프슈트가 걸려 있다. 내 신발장엔 페인트와 본드가 덕지덕지 묻은 신발이 아직도 들어 있고, 초록 페인트가 군데군데 묻은 검은 구스다운도 현관에 여전히 걸려 있다.

 시간은 흘렀고, 노력은 완성을 이룬 듯 하지만 서른아홉의 배움은 여전히 여기 남아 있을 것 같다. 작업복에 남은 페인트자국처럼 지워지지 않고 내 안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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