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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혜나 Feb 20. 2024

이타적인 삶의 가능성에 대하여

이타적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지가 제법 되었다.


오직 나. 나. 나에게만 국한된 나의 시선에 신물이 날 정도로 질리기도 했고, 나만 잘하면 된다는 철학에서 조금이라도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치관이 조금 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잘 모르겠다.

이타적인 삶이 과연 무엇일까?

그에게 없지만 내게 많은 것을 조금 나누어 주는 선의?

환경을 살려보겠다는 나비의 날갯짓 같은 움직임?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나의 여유를 조금 포기하는 희생?


변질된 선에서 솟는 것만큼 지독한 악취도 없다. 그것은 인간에게도 신의 경우에도 한낱 썩은 고기일 뿐이다.                                                                                                       [월든] p109

 소로우는 변질된 선의만큼 냄새나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이타적으로 살겠다고 할수록 내가 하는 어떤 움직임도 결국엔 이타적일 수 없다는 것만 더욱 여실히 깨달을 뿐이다.

아무리 배고픈 이도 자신의 취향이 있다. 허기를 채우려 아무거나 먹겠지만 허기가 조금만 가시면 자신의 취향을 찾아 먹는 게 사람이다. 그가 나보다 못 먹는 것 같아서 내 접시의 것을 덜어주는 일에 선의라는 말을 붙일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쯤에서 결국 선의를 베풀 존재는 나 자신 하나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내가 선의를 베풀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나뿐인지도 모르겠다는 말로 정정한다.


이타적이란, 갖은 모욕 속에서 십자가를 진 예수 같은 삶뿐이지 않을까. 그는 그 순간에도 이 희생으로 얻을 자신의 왕좌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발 밑에서 자신에게 침 뱉는 이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가 되었다.

 

그런데 또 궁금하다.

그는 그런 일을 해서 그리스도가 되었을까, 그리스도가 될 존재였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걸까?

인간은 그리스도적 삶으로 완성되어 야 하는 걸까, 그저 구원받은 존재로 만족하면 되는 걸까?


결국엔 이 질문이다.

사람은 과연 이타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인가?







*그리스도=히브리어 '메시아'에 대한 그리스어로 기름부음 받은자, 구원자 라는 뜻을 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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