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라는 이름의 마음 지도
이십 년 전쯤, 미국 동부에 있는 한 회사에서 인턴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몇 달간의 일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서부 여행을 계획했다. 즉흥적인 성격답게 아무런 일정도 세우지 않고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편도 항공권만 달랑 준비했다. 도착하자마자 버스를 타고 유명한 게스트하우스로 무작정 찾아갔다. 당연히 대부분의 방은 이미 꽉 차 있었다. 16명이 함께 쓰는 대형 도미토리 자리가 딱 하나 남아 있어 놓칠세라 얼른 예약했다.
그 이후 여행은 순탄치 않았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 인터넷에서 길을 찾아 메모지에 적어가며 움직여야 했다. 한 번은 버스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코카콜라 본사에 간다고 갔는데, 도착해 보니 불이 컴컴하게 꺼진 진짜 코카콜라 공장이었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며칠 동안 이곳저곳을 헤매듯 다니다 보니 점점 서럽고 외로워졌다. 결국 모든 서부 여행 일정을 취소하고 비행기표를 앞당겨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때 만약 내 손에 잘 정리된 지도가 한 장이라도 있었다면 어땠을까?
가고 싶은 곳들을 대략적으로라도 표시해 둔 지도가 있었더라면 그렇게 허무하게 시간을 보내고 두고두고 후회하진 않았을 것이다.
내 마음을 탐험하기 위해서도 지도가 필요하다. 마음속 이야기를 쓰는 일은 나에게로 여행을 떠나는 일이다. 그 여행을 조금 덜 막막하고, 더 즐겁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목차’라는 지도다.
나는 처음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글을 써본 후, 내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담아보고 싶었다. 한 번도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못했던 마음속 이야기를 시원하게 쏟아내고 싶었다. 그동안 살아온 시간을 찬찬히 돌아보고 싶기도 했다.
가만히 앉아 지난 시간을 되짚으며 결혼 후 지나온 일들을 하나하나 적었다. 시간의 순서대로 제목을 나열하니 열 개의 꼭지가 되었다. 그렇게 만든 목차 덕분에 매주 혼자 앉아 글을 쓸 때마다 막막하지 않았다. 어디부터 써야 할지 고민하는 대신, 그 주에 쓸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 구슬을 꿰듯 이어갔다.
누구나 저마다의 스토리가 있다. “내 이야기를 쓰면 소설책 몇 권은 나올 거야.” 하고 말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하지만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이야기도 꿰어야 보배가 된다.
백지 앞에 앉으면 누구나 두렵고 막막하다. 그럴 때 미리 만들어둔 목차는 길을 잃지 않도록 이끌어주는 작은 지도다. 정해진 시간에, 마음먹은 장소에 앉아 그 지도를 따라 하나씩 적어 내려가다 보면, 내 마음속에 엉키고 설킨 이야기들이 고운 구슬처럼 꿰어질 것이다.
목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쓰고 싶은 내 인생의 이야기가 무엇인지 찾아내야 한다.
다음은 내가 써야 할 이야기를 모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질문들이다.
펜을 꺼내 아래 질문들에 답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모든 질문에 다 답할 필요는 없다. 다만 답할 때는 단답형이 아니라 문장형으로, 되도록 육하원칙에 맞춰 써보는 것이 좋다.
중요한 점은 모든 답변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솔직한 이야기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내 마음을 쓰는 글을 쓰고 있으니까.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가치, 물건, 사람 등등)은 무엇인가요?
왜 그 가치를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요?
살면서 그 가치가 훼손되어 괴로웠던 적이 있었나요?
나는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살아있다고 느끼나요?
그 일을 할 때 나는 구체적으로 어떤 감정이 드나요?
살면서 가장 크게 울었던 때(좋을 때, 슬플 때 모두)는 언제인가요?
그 일 이후에 나는 어떻게 달라졌나요?
조건도 책임도 없이 그냥 마냥 좋은 것, 혹은 좋아했던 것이 있나요?
살아 있음이 고통스럽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나요?
살면서 가장 크게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현재 너무 미워하는 사람이, 혹은 과거에 너무 미워했다가 회복한 사람이 있나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나요? 그때 나는 어떤 상황이었나요?
심장이 찢어지듯이 아팠던 기억이 있나요?
그동안 만난 수많은 사람 중에 가장 사랑했던 사람은 누구인가요?
그와 나는 지금 어떻게 되었나요?
지금 나를 하루하루 살아가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내 삶에 감사할 이유가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위의 질문들에 천천히 시간을 들여 답해보았다면, 아마도 살아오며 겪었던 수많은 순간들이 머릿속에 하나둘 떠올랐을 것이다.
질문에 답하는 동안 떠오른 일들을 간략히 메모해 본다.
내용마다 임시 제목을 붙여본다.
제목들의 순서를 정해 나열한다.
이때 순서를 정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사건이 발생한 시간 순서대로 배열할 수도 있고, 감정의 결이나 상황별, 사건별로 묶어도 좋다.
만약 내 마음을 찬찬히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크다면, 시간의 순서대로 목차를 만들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과거에서 현재로 배열하면 오래된 마음의 앙금이 먼저 건드려질 것이고, 현재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점점 더 깊숙한 마음의 뿌리에 가 닿을 수 있을 것이다.
목차를 마침내 완성했다면, 이제 내 손에는 가고 싶은 곳들이 표시된 하나의 지도가 쥐어진 것이다.
실제 여행이 늘 계획한 대로만 흘러가지 않듯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마음먹은 대로만 써지지 않을 때가 분명 있을 것이다.
길을 잃을 것 같을 땐, 지도를 펼쳐보듯 목차를 다시 들여다보자. 그러면 오늘 내가 써야 할 이야기가 다시 떠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