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장소, 실행, 씀
함덕 해변이 내려다 보이는 대형카페의 구석에 앉았다.
아보카도 바나나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랩탑을 펼쳤다.
일단 펼치긴 했는데 뭘 써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 눈을 감고 글쓰기 수업 첫 시간에 나를 똑바로 보고 말해주시던 선생님의 눈빛을 떠올렸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 키보드에 손을 얹었다.
'우하하하. 나는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지? 뭐 쓰지? 아 몰라. 망했다. 아바셰이크 맛있다.....'
마구잡이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정말 아무 말 대 잔치였다.
그렇게 시간이 오분쯤 지났을까.
탁탁. 타다닥. 타닥. 탁. 타닥.
손가락이 점점 리듬 있게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오호, 이것 봐라?'
신기한 일이었다. 점점 내 속에 있던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던, 돈을 주고받던 상담에서도 하지 못했던 내 이야기가 토하듯이 마구 튀어나왔다. 아무 겉치레도 없는 선명한 의식의 흐름만이 내 안을 가득 채웠다.
얼마 가지 않아 나는 키보드를 두드리며 울기 시작했다. 주변에 손님이 몇 명이나 있는지, 창 밖에서 내가 우는 모습이 보이지는 않는지....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글과 나, 그 외에 아무것도 없는 시간이었다.
딸에게 작가가 되고 싶다고 대답한 그날 이후, 나는 서서히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과연 내가 써도 되는 사람일까?'
스스로를 수없이 의심했지만, 이상하게도 손은 자꾸만 키보드를 향했다. 그렇게 나는 어느새 쓰는 사람의 방향으로 슬그머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처음엔 막막했다.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강좌를 듣고, 글쓰기 책을 읽어보아도 막연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끄적이는 것과 한 편의 글을 시작해 끝까지 써내는 일은 완전히 다른 세계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길을 잃고 헤매는 사이, 1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그 무렵 나는 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우울은 점점 자주, 그리고 깊게 나를 찾아왔고 남편과의 관계도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여행으로 들렀던 제주에서 문득 ‘여기라면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다’는 감정을 느꼈던 기억이 떠올랐다. 충동에 가까운 선택이었지만, 나는 결국 아이들과 함께 제주살이를 결심했다.
막연한 기대만 안고 도착한 제주에서, 나는 참 좋은 인연들을 많이 만났다. 그중에서도 잊지 못할 한 분이 바로 우리 마을에 살던 작가 선생님이다. 선생님이 진행하시던 글쓰기 수업에 참여한 첫날, 나는 글이 전혀 써지지 않는다고,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울먹이며 털어놓았다.
그때 선생님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정말로, 막 써도 돼요. 알겠죠? 그냥, 일단 막 쓰세요.”
그 눈빛, 그 말. 선생님의 진심이 느껴졌다.
그 순간, 나는 진짜 막 써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일주일에 하루, 오직 나만을 위한 글쓰기 시간을 만들었다. 아이들이 아직 어려 더 많은 시간을 내기는 어려웠지만, 남편이 내려오는 주말이면 아이들을 맡기고 카페로 향했다.
정해진 시간, 혼자 있는 공간, 그리고 랩탑과 나.
그렇게 반년이 지나자, 나는 어느새 한 권의 책이 될 초고를 완성할 수 있었다.
먼저, 일단 쓰는 시간을 정한다.
쪼개진 시간 말고, 통으로 쓸 수 있는 시간을 정한다. 되도록 긴 시간이 좋다. 2시간 이상은 꼭 마련한다.
그다음, 방해받지 않을 장소를 고른다.
중간중간 튀어나올 요소들(예를 들면 가족, 친구)이 없는 공간이 좋다. 작은 카페보다는 큰 카페의 구석이 좋다.
세 번째로 쓸거리를 가지고 그 시간에 그 장소에 가서 앉는다.
이 단계가 생각보다 쉽지 않을 수 있으니 맘을 단단히 먹고 실행한다.
마지막으로, 일단 쓴다. 무슨 말도 괜찮다. 그냥 막 쓴다.
일단 머리에 떠오르는 아무 말이나 막 쓰다 보면 신기한 일이 일어난다. 갈수록 점점 쓸 말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그건 시간과 공간을 미리 준비한 덕에 일어나는 마술 같은 일이다.
그러니 시간과 공간은 반드시 미리 계획하는 게 좋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 그냥 와다다 쏟아내자. 속이 뻥 뚫릴 만큼.
공포가 엄습하면? 참지 말고 울자. 눈물을 마음을 씻는 물이다.
웃음이 터지면? 눈치 보지 말고 실컷 웃자. 웃음을 마음을 닦는 수건이다.
이 시간만큼은 이성은 잠시 뒷자리에 앉아 있으라고 하고, 본능에게 운전대를 맡기자.
쓰다 보면 어느 순간, 갑자기 시간이 멈춘 것 같고, 주변 풍경도 사라진다. 글과 나만 있는 것 같다. 무언가에 홀린 듯 손이 알아서 움직이는 이상한 기분이 든다. 우뇌가 미친 듯이 활성화돼서 그렇다.
괜찮다. 그래도 멈추지 말고 그냥 계속 써라. 손이 가는 대로, 마음이 이끄는 대로.
그럼 언제 멈춰야 할까?
감정이 정돈되고, 문장이 스스로 마무리를 하는 순간이 온다. 그때, 자연스럽게 끝내면 된다.
다 쓰고 나면, 잠깐 눈을 감자.
오른손으로 왼팔을, 왼손으로 오른팔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자. 가슴도 쓱쓱 문질러 주면 좋다.
화장실에 가서 얼굴을 한번 들여다보며 거울 속 자신에게 말해 주자.
오늘 내 말을 들어줘서 정말 고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