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에는 담당하는 교양 강의에 특강 강사로 한 시인을 모셨다. 강의를 시작하며 시인은 한 편의 에세이를 보여주었다. 그러고는 “누가 쓴 글 같아요?”라고 물었다. 사유도 문장도 아름다운 완성도 높은 글이었다. 나는 우리가 함께 아는 여러 작가를 떠올렸다.
친하다고 말했던 그 소설가의 글인가? 아니면 수필집을 펴낸 그 시인의 것일까? 학생들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 글은 코미디언의 글입니다.” 나를 비롯해 강당에 앉은 이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방송에서 보아왔던 유쾌한 이미지와 사뭇 다른 진중함에 놀란 것이기도 하겠지만, 다들 그 글을 전문 작가가 썼다고 추측했기 때문일 테다. 시인은 누구나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여러 작품을 보여주었다. 유명한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와 파블로 피카소가 쓴 시도 함께 보여주었는데, 붓질하듯 시어를 덧칠해 내는 독특한 작법이 생경하고 신선했다.
우리가 아이였을 때는 누구나 화가였다는 이야기를 어디에선가 듣고 잠시 멍해진 적이 있다. 어른이 되어서는 많은 이들이 그림 그리는 일은 전공자나 하는 행위라며, 자기와는 먼일이라고 선을 그어버린다. 글쓰기도 똑같다. 가정의 달이면 교실에 모여서 쓰던 편지, 미루고 미루다 개학을 앞두고 지나온 날들을 허겁지겁 불러와 적던 일기, 늦은 밤 상대가 자고 있지 않길 바라며 조심스레 건네는 메시지. 이 모든 게 하나같이 글쓰기였지만,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글과 함께 살아온 셈이지만, 현학적이고 어려운 글만 떠올리며 거리감을 느끼곤 한다. 고상한 단어를 활용해야 할 것 같고, 따라 할 수 없는 필력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지레 겁을 먹기도 한다.
우스운 것은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고 한 주에도 서너 번 넘게 말하는 나조차도 그렇다는 것이다. 거시적인 관점을 제시해야 할 것 같다는 강박, 고급스러운 어휘와 고차원적인 담론을 늘어놓아야 할 것 같은 압박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특강이 끝나갈 때쯤, 시인은 전봉건 시인의 시를 한 편 보여주었다.
참새 떼를 묘사하는 시는 “포롱 포롱 포롱” 세 번 되뇌고 끝이 난다. 포롱포롱은 새의 가벼운 몸짓을 표현하는 부사이다. 시인은 그가 이 단어를 쓰고 싶었던 것 같다고 추측했다. 나는 그 짐작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어떤 말을 쓰고 싶다는 것, 그저 한 단어를 몇번 기분 좋게 외고 싶다는 것, 그런 것도 글쓰기의 동기가 될 수 있다.
이쯤에서 또 대단한 작가를 인용하게 되어 유감이지만, 소설가 조지 오웰은 자신의 글쓰기 동기 중 하나로 순전한 이기심을 꼽은 적이 있다. 똑똑해 보이고 싶고 사후에 기억되고 싶다는 욕망, 어린 시절 자신을 푸대접한 어른들에게 앙갚음하고 싶은 욕구, 그런 것도 글쓰기의 강력한 동기가 된다는 것이다. 글을 쓰려는 마음이 고결한 대의에서 비롯할 필요는 없다.
일례로, 언어유희를 너무나 좋아하는 나는 글 제목에 자꾸만 동음이의어를 쓴다. <비평(非平)한 비평(批評)> <무력(武力)에 맞설 무력(無力)>……. 나의 첫 글인 <이차원의 사랑법>은 아무도 몰랐겠지만, 이 차원과 2차원을 중의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여태 혼자 이 제목을 귀애한다. 절친한 친구는 나의 지나침을 지적하며 “넌 언어유희 하려고 평론가 됐냐?”라고 핀잔을 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기뻐서 한바탕 웃었다. 진짜 그렇잖아? 언어유희를 마음껏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흡족했다.
글쓰기는 그런 매력이 있다. 언어를 배웠다면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나 자기만의 언어를 가져볼 수 있다. 선호하는 단어를 내가 좋아하는 만큼 마음껏 쓸 수 있고 현실적이지 않은 생각도 자유로이 표현할 수 있다. 저 멀리 노스캐롤라이나의 구름에 내 옆에 누운 보드라운 고양이를 태워볼 수도 있다. 우리가 모두 한때는 작가였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 이력을 지녔다는 사실을 잊지만 않는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