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직할 곳 없이 용감하게 회사를 퇴사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이직할 직장이 확정된 게 아닌데도 잘 다니고 있는 멀쩡한 회사를 그만둘까 나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친구들이 있다. 일명 쌩퇴사. 백수 되겠다 이거예요.
친구들이 쌩퇴사를 고민할 때마다 결국은 너의 상황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고 말해주지만 그걸 그들이 몰라서 나에게 퇴사고민을 털어놓는 건 아닐거다. "그래 그만두는 게 낫겠다" "아니야 다니자" 이렇게 시원하게 적부를 알려주는 쌩퇴사 자격검정 테스트같은거 없나? 생각하다가 한번 만들어봤다. 쌩퇴사 자격 자가진단 테스트. 이 테스트는 간단하다. 2가지 유형의 퇴사 만류 조언에 본인의 대답이 어떻게 되는지에 따라 O 아니면 X로 쌩퇴사를 할지 말지에 대한 답을 준다. 두 조언 모두에 본인만의 분명한 반박 답안을 적어낼 수 있다면 쌩퇴사 자격(?)을 갖추게 된다.
우선 쌩퇴사를 만류하는 많은 인생 선배님들의 조언들은 크게 다음의 두 가지로 나뉜다.
1번. 아무튼 백수는 안돼 류
회사 안은 전쟁터지만 회사 밖은 지옥이다. 회사 밖은 춥다. 옮길 곳은 정하고 나가라. 코시국에는 웬만하면 버텨라.
2번. 니 인생 이미 정해졌음 류
회사는 결국 거기서 거기다. 쌩퇴사한 사람들 다 후회한다. 너도 후회할거다. 나도 너때 퇴사고민했었는데 시간 지나면 괜찮아진다. 니 나이도 적지 않고 요즘 취업시장도 어려운데 대책 없이 퇴사하면 재취업 쉽지 않을 거다.
이 두 종류의 조언에 흔들린다면 그건 아직 쌩퇴사할 때가 되지 않은 것이다. 지금의 회사에서 매달 나오는 월급이든, 조직에 소속되어 있다는 안정감이든, 지인들이나 금융기관으로부터의 인정이든, 이 회사에서 뭔가 지키고 싶은게 있다면 퇴사 만류 조언을 반박하기 어려워진다. 퇴사하지 말라는 조언에 설득된다고 해서 자괴감을 느낄 필요는 전혀 없다. 오히려 자랑스러워해도 된다. 퇴사 만류 조언에 흔들린다는 건 지금 다니는 회사가 그만큼 괜찮은 회사라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러니 당장 퇴사하기보다는 우선은 출근을 하면서 회사 안에 있는 본인의 가치를 지키면 된다.
그리고 내가 저런 퇴사 만류 조언들을 듣고서도 전 직장 쌩퇴사를 실행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회사 안에서 지킬 수 있는 것보다 회사 밖에서 해보고 싶은 게 더 소중해졌기 때문이었다. 수개월의 고민 끝에 나의 양팔저울이 회사 안에서의 가치보다 회사 밖에서의 가치로 기울어지자, 나는 저 퇴사 만류 조언들을 반박하는 나만의 답안을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
위 두 가지 유형의 퇴사만류 조언에 대한 내 생각과 답안은 다음과 같았다.
1번. 아무튼 백수는 안돼 류
이 조언에 대한 답안은 주로 수치화할 수 있는 재정, 나이, 경력 문제와 연결되어 있어서 상황 분석과 판단이 비교적 쉬웠다. 내가 지금까지 모은 돈이 얼마고 한달에 지출은 얼마니까 이걸로 얼마 동안은 버틸 수 있겠다. 아직은 내가 XX살이니 목표 회사가 아니더라도 중고신입으로 재취업을 할 수는 있겠다. 등등
내 답안:
- (돈 있음) 수입 없이 1년 정도 버틸 돈 있음.
- (시간 투자해서 경력 전환할거임) 그래서 지금 나에게는 당장의 작고 귀여운 월급이나, 좋아하지만 미래가 걱정되는 이 분야 경력보다 내 미래에 투자할 시간이 더 중요함. 회사 다니면서 목표 진로 병행하는 거, 내 능력으로 안 됨.
- (회사 밖이 회사 안보다는 따뜻할 거 같음) 나에게는 내가 원치 않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이 회사가 지옥이고 내 인생의 방향을 내가 원하는 쪽으로 틀어볼 수 있는 바깥이 전쟁터였음.
- (다 버리고 새출발해도 괜찮은 나이임) 나 아직 XX살이고, 여기 경력 더 쌓여서 애매해지기 전에 인생의 방향을 틀고 싶음.
- (아무튼 이 회사 일 더이상 1도 하기 싫음) 이 회사에서 펼쳐질 새해가 1도 기대가 안되고 회사의 모든 프로젝트에서 빠지고 싶음.
- (결론) 그러니까 월급은 됐고, 내 시간 내놔요.
2번. 니 인생 이미 정해졌음 류
이 부분은 숫자로 말하기 어려운 경험적, 멘탈적 부분이라 상황 분석과 판단이 어려웠다. "이대로 퇴사하면 니 인생은 망한다니까?"라는, 딱히 근거는 없지만 무시무시한 심리적 위협에도 꿋꿋이 답안을 작성하려면 "뭐 망해도 난 일단 퇴사할래요" 정도의 두둑한 배짱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배짱이 굳이 모두에게 있을 필요는 없다.) 나의 경우에는 더 늦기 전에 내 인생의 방향을 내 손으로 바꾸고 싶어서 리스크 테이킹을 해보기로 했다.
내 답안:
- (회사 밖 내 미래의 시나리오는 다양하다) 퇴사하고 뭐할지 계획 세워놨고 망할 경우를 대비한 플랜 B, C, D도 있음.
- (그 미래 시나리오들이 최소한 여기 계속 다니는 것보다는 괜찮다는 점) 이 회사 안에서의 최상의 미래(승진이나 동종업계 내에서의 이직)보다 이 회사 밖에서의 최악의 미래(플랜 D)가 더 나음.
- (내 인생은 내가 정한다) 내가 퇴사하고 망할지 잘될지, 후회할지 만족할지, 내 미래를 회사 사람들이 어떻게 안단 말인가. 내가 뭘 추구하고 어떤 게 중요한 사람인지, 백수 기간의 스트레스에 얼마나 취약하거나 강할지, 회사 상사보다는 내가 더 잘 앎.
- (가족의 응원) 내 인생이 잘 풀리기를 나만큼이나 바라고 있는 가족들도 이 회사 퇴사하고 다른 진로로 틀어보겠다는 내 선택을 응원해줬음. (감사하게도 백수 기간 후반기에는 금전적으로도 지원해주셨다)
- (결론) 뭐 망해도 일단 퇴사할래요.
이렇게 나는 수개월의 고민 끝에 퇴사 만류 조언들을 나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반박할 수 있게 되었고 주변인들의 우려와 응원 끝에 쌩퇴사를 감행했다. 쌩퇴사 자격 자가진단 테스트에 충실히 임하고 나만의 답안을 가슴에 새긴 채 실행했던 내 쌩퇴사는, 결과적으로는 내 인생의 잘한 선택 중 하나로 꼽는 성공적인 선택이 되었다.
이 자가진단 테스트는 일견 간단해보이지만, 그 결과값이 한순간에 뿅 하고 나오는 그런 초고속 진단검사는 사실 아니다. 퇴사 만류 조언들에 대한 자신만의 반박 답안을 완성하기까지는 최초의 퇴사고민 시작시점으로부터 길게는 몇년의 고민과 시간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의 인생에서 직장은 중요하고, 그런 직장을 그만둔다는 건 신중할 필요가 있는 결정이니까 말이다. 자신의 직급과 연차, 지향하는 인생의 방향, 정신적·신체적 건강상태, 재정적 상황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나만의 답안을 작성해야 한다.
이렇게 각자의 상황에 따라 각자의 답안이 달라지기 때문에 쌩퇴사를 할지 말지에 대한 각자의 선택도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를 잘 알지 못하는 타인에게 퇴사 조언을 구하는 건 큰 의미가 없을 수 있다. 동시에 타인에게 퇴사를 해라 마라 라고 말할 자격도 우리에게는 없다.
그런데도 사람 심리가 꼭 퇴사할지 말지를 자가진단을 하지 못하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답안을 작성하고 싶어진다.나도 별 수 없는 휴먼이라 동생에게 이 답없는 고민을 몇 달 간 털어놓았다. (퇴사할까? → 그래 해→ 아 근데 여기 일은 좋은데 → 그럼 하지 마 → 아 근데 여기 계속 있으면 안될 거 같은데 → 그럼 해 → 아 근데... 의 무한반복. 동생아 미안해)정답이 없는 문제일수록 정답이 뭔지 더 치열하게 고민한다는 게 아이러니이다.
그래서 이 테스트의 이름도 자가진단 테스트이다.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이 쌩퇴사가 그런 나에게 납득되는지 아닌지를 스스로 알아보기 위한 테스트. 답안 작성 과정에서 타인의 의견을 듣는 건 가능하지만 결국 답안을 작성하고, 그에 따르는 무거운 책임을 지는 것도, 달콤한 결과를 누리는 것도, 언제나 바로 나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