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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평리이평온 Mar 25. 2024

수선화

재작년이었던가?     


방주할머니 식당 텃밭에 수선화가 만발했기래 할머니께 여쭤보니 직접 심고 가꾸시는 꽃이라 했다. 

만 원으로 열 송이를 사서 우리 집 마당 구석에 줄지어 심었다.     

그 후 봄마다 알뿌리식물인 수선화는 집 마당 매실나무에 매화꽃이 한 아름 피어나 스러지면 비죽비죽 푸른 순을 잔디밭 위로 뾰족이 드러낸다. 


올해도 봄비가 내리고 날이 따뜻해지며 완연한 봄바람이 불어오니, 수선화는 아내가 아침으로 차려내는 ‘하얀 접시 위 노란 계란프라이’ 같은 노란 꽃을 틔워내어 우리 집 마당에 화사함을 더해 주었다.    



제주에서 위리안치 귀양을 살았던 추사 김정희는 유독 수선화를 좋아했다. 

추사는 당시 사대부들이 좋아하던 난초보다 단아하고 우아한 기품 있는 향기를 가진 수선화로 귀양살이의 설움을 삭였다.     


날씨는 차가워도 꽃봉오리 둥글둥글(一點冬心朶朶圓) 

그윽하고 담백한 기풍 참으로 빼어나다(品於幽澹冷雋邊)

매화나무 고고하지만 뜰 벗어나지 못하는데(梅高猶未離庭砌) 

맑은 물에 핀 너 해탈한 신선을 보는구나(淸水眞看解脫仙)     


아마도 제주 지천으로 피어난 수선화의 진가를 몰라보고 농부들이 소와 말 먹이로 쓰거나 보리밭을 해친다며 파내어 버리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진심을 몰라준 채 조정에서 가장 먼 탐라에 유배한 임금을 원망했을 수도 있겠다.

      

아내는 꽃을 좋아한다. 

어쩌다 꽃다발이 생기면 정성껏 소분하여 거실 곳곳 화병에 시들 때까지 꽂아 둔다. 

나는 무심히 넘기는 우리 집 작은 마당 곳곳에서 계절마다 꽃을 피워내는 작은 식물에도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곤 한다.    

 

“그거 알아? 우리 집 마당 볼품 없지만, 사시사철 꽃이 핀다!

봄에는 연분홍 매화가 먼저 피고 단아한 수선화가 솟아올라. 

여름에는 수국이 몽글몽글 파스텔톤 꽃을 피우고 여름이 깊어지면 화사한 장미가 펴. 

뒷담에 심은 보라색 로즈마리와 라벤더는 생식력이 어쩜 이리 강한지 큰 나무가 되어 사방이 허브향으로 가득해!

겨울에는 동백이 빨간 꽃봉오리로 감싸 안고 있다가 어느 날 문득 뚝뚝 꽃을 떨어뜨린다.”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 

사시사철 꽃이 핀다. 

그리고 그 중 몇몇은 우리 부부가 모종을 사서 마당 구석구석에 심은 것들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제주에서 전원주택을 구하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 이야기를 쓰다 보니 작은 궁금증이 피어오른다.     

꽃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일까? 위로를 전해줄까? 마음을 푸근하게 풀어줄까?     


그리고 작은 소망이 하나 생겼다.     


결혼한 지 이제 20년. 

낡은 주름을 새긴 중년의 부부가 되었지만 서로 꽃 보듯이 귀히 여기며 살았으면 좋겠다. 

할미꽃보다는 봄날의 수선화 보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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