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때문에 멀어진, 내가 사랑한 친구들에게
가정폭력의 피해자들은 대부분 그 사실을 숨기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그 사실을 숨기기도 한다. 그들이 상처를 받거나, 혹은 자신이 상처받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나는 두 친구에게, 각각 비밀을 말하거나 말하지 않았지만 두 친구와 모두 멀어지게 되었다.
먼저, 내 비밀을 말한 친구는 이전부터 페미니즘적으로 개방적이었고, 더욱이 스스로 정신과를 잠시 다녀서 정신병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서 우울증에 대해 털어놓으면서 말을 꺼내게 되었다. 대학교를 첫 입학할, 두근두근 설레는 시기에 나는 오히려 극심한 우울감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참고 참던 우울이 고3이라는 압박이 끝나자마자 밀려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평범하게 고등학교를 다니며 친구들과 이야기하던 시간이 잠시 고요해진 순간 아버지와 좀 더 부딪히게 되었다. 극심한 우울감, 정체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무기력감에 질식할 것 같을 때마다 나는 간신히 집 밖으로 나가서 친구를 찾았다. 친구는 전화기 너머로 내 얘기를 흘려들었지만 적어도 내 얘기를 들어주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묵묵히.
"정신과를 갔으면 좋겠다"
친구가 해 준 말이었다. 맞는 말인데, 나는 정말로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본인 때문에 내가 미친 게 아니라 정신과에 가면 미친 사람이 되는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어느 순간 아버지의 말을 체화하고 있었다. 정신과에 가는 게 미쳤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정신과에 대한 거부감을 키우고 스스로 아버지와 싸울 수 없는 존재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 혼자 견딜 수 있겠지 하고 버티던 게 사실 남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사실 그게 병이었는데, 그 상황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미드 소마에 나오는 대니를 닮아가고 있었다. 주변인들이 언제까지 내 사정을 봐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날 밀어내면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될까 봐 귀찮아하면서도 헤어지지 않는 그 친구가 오히려 날 더 힘들게 했다. 어느 날부터 그 친구는 방어적이 되었다.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내 상황이 안타까워서 받아주는데, 그게 짐처럼 느껴져서 날 싫어하게 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날, 나는 그 친구와 불같이 싸우고 두 번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남에게 내 비밀을 털어놓으면 그게 그 사람에게 짐이 돼서, 언젠가는 서로 좋아한다고 여긴 관계를 잡아먹게 되는구나. 그날 깨달았다. 그래서 다음 친구에게는 내 현실을 전혀 말하지 않았다.
그 친구는 내가 자기처럼 다소 "엄할 뿐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줄만 알고, 그 아버지에게 의지할 수 있을 줄만 알았다. 그 친구는 나를 마음 편하게 대할 수 있었다. 원하면 언제든지 놀러 가고, 언제든지 편하게 연락하고, 다른 주변 친구들처럼 농담과 장난을 던질 수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서로 편하다고 생각했던 그 관계가 내가 안정적인 기반을 잃자 빠르게 무너졌다.
비밀을 숨긴다고 해서 진정으로 편하게 대하는 관계로 남을 수 있는 건 아니구나. 이번에는 그 편함이 불편해졌다. 으레 같을 줄만 알던 집안 사정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대하고 내 가정이나 앞으로의 계획을 공유하고자 하는 그 태도 앞에 간신히 비밀을 지켜봤자 의뭉스러울 뿐이었고 그 비밀이 우스갯거리가 되어 입에 오르자 나는 끝을 실감했다.
두 친구 모두 내가 사랑했던 친구들인데, 비밀을 지켜도 무너지고 지키지 않아도 무너진다. 애초에 비밀이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컸던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지금의 나는 이 비밀을 감당하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 참을 수 없어진 밤에, 나는 몰래 멀어진 친구에게 닿지 못할 말을 써본다. 친구야, 네 잘못도 내 잘못도 아니고 그냥 이건 비밀이 너무 무거워서 그래. 언젠가 비밀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내가 강해 지거나 비밀이 더 이상 내게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할 때 나는 다시 누군가 곁에 두게 되겠지. 그래도 그때도 네 생각을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