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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초 Nov 09. 2022

가정폭력에 답이 없을 때가 있다.

인생은 대부분의 경우 비합리적이다. 그러니 비난하지도, 자책하지도 말자.

가정폭력을 피해 집을 나온 이후, 나는 아버지가 날 찾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내 흔적과 기록을 지우려고 애썼지만, 때때로 그 노력이 불필요한 건 아니었나 하는 의문이 날 사로잡을 때가 있다. 그래서 때로 아버지가 날 찾으려 했다는 걸 알게 되면 오히려 안도하기도 한다. 이게 불필요한 노력은 아니었구나 하고.

반대로 노력이 성과가 없을 때면 다시 좌절했다.


나는 한국 여성의 전화에 두 번 전화를 걸었다.

처음 한 번은 아버지가 경찰을 통해서 나를 찾는 걸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냐는 전화였고, 다른 하나는 입소 확인서를 발급받을 수는 없냐는 전화였다. 물론, 당연하지만 두 문제 다 증거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의견이었다. 명확한 폭력의 증거, 진단서나 경찰 기록이 필요했다. 홈페이지에는 가정폭력에는 물리적 폭력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쓰여있는데, 가장 간단한 물리적 폭력이 아니면 증명하기 쉽지 않고, 그래서 선택하는 차선책은 결국 증명할 방도가 없기에 막힌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나를 다독여보지만, 쉽지 않다. 이럴 때마다 끔찍한 무기력감에 빠져, 나를 놓아버릴 것만 같다. 차라리 마주 대하고 답이 나오지 않는 싸움을 하는 생각을 한다. 어느 날은 아버지한테 공격당하고 그걸 안도하면서 잠에서 깬 적이 있다. 아, 증거가 생겼구나 하고.


어렸을 때의 나는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비논리적인 분노에도 분명 원인이 있고 이걸 알면 피할 수 있을 거란 헛된 믿음도 가져봤다. 그런데 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이 폭력적이라는 걸 느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분노를 때때로 자식의 탓으로 돌렸고, 나도 어느 순간에는 어머니의 탓으로 돌린 적이 있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내 탓을 했다. 내가 뭔가 잘못했구나라는 생각보단 내가 뭔가 잘하면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믿음이다. 무조건적인 분노가 어디에 있겠어라고, 아닌 땐 기둥에 불나겠어라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믿지만 현재까지의 경험으론 그건 거짓말이다. 


세상에는 합리적으로 이해되는 일들이 무척, 무척이나 적다. 아버지의 분노도 그렇고, 정말 철없는 어린애가 아버지의 분노를 막을 수 있을 거라 믿는 어른의 기대도 그렇다. 무언가 잘못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피해자를 질책하고, 가해자 편에서 의견을 찾으려고 한다. 근원적으로 돌아가 왜 그 사람과 결혼했을까 수백 번 묻기도 한다. 가해자는 극히 비이성적이고 말이 통하지 않는 존재이기에 애초에 그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한다. 왜 죽였습니까? 하면 가해자들은 그 여자가 날 어떻게 봤어요. 하고 답한다. 그럼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으면 살았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 믿음은 그냥 살아남기 위한 믿음에 불과하다.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이 날 괴롭히지 않을 거야 하는 믿음은 부외자로서 자신을 피해자와 분리하거나, 피해자에게는 불편한 관계를 이어갈 희망이 된다. 그렇지만, 정말 심각한 경우들엔 그건 그냥 예측이다. 마찬가지로, 노력했다고 무언가가 된다는 것은 믿음이지 현실이 아니다. 올해 이그노벨 경제학상은 성공의 비결에 행운이 있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입증했다. 정확히는, 노력과 성공이 관계가 없을 확률에 대한 입증이지만, 다시 말하면 현실은 비합리적이다.


노력한다고 해서 꼭, 무언가 되는 건 아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수능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더라도 수시로 다른 대학에 들어가게 될 수도 있고, 혹은 좋은 대학을 나오더라도 취직으로 바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공시 생활을 3년 넘게 지냈어도, 코피를 흘려가며 공부했어도 불합격할 수도 있다. 가정폭력을 피해 도망쳤는데,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되돌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탈가정 청년 중 일부는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노력하지 말자는 말이 아니다.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남을 비난할 수 없고, 자책하지 않아야 된다는 말이다. 내가 엄마를 비난하거나, 때로 나 스스로 왜 싸우지 않았냐는 질문을 던질 때마다, 무기력해질 때마다 오히려 그 말이 위로가 되었다. 그때의 나에게, 몇 번이나 반복해본다. 그때의 나에게는 그때 가능한 최선이 있다고. 네가 노력하지 않아서 아직도 얽매이는 게 아니라, 정답이 없는 문제라서 헤매는 것뿐이라고.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그 말이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당신이 어떻게 하든 관계없이 다가오는 폭력도 있으니, 그게 당신을 덮쳤을 때 과거의 행동을 후회하면서 시간을 보내거나, 결국 노력이 실패한다고 무기력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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