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소서4번 #솔직한자소서 #가정폭력
구직서류에서 가족관계에 대한 질문들이 많이 사라졌다고 했으나, 모 회사의 지원서류를 작성하다가 가족관계 항목을 보게 되었다. 그 회사는 소위 가족경영 기업으로 면접장에서도 가족과 관련된 질문이 나온다고 들었다. 나는 가족의 성함, 생년, 그리고 직업까지 기재하게 되어있는 칸을 보면서 지원을 포기했다.
옛날부터 "자소서 4번 항목 : 지원자의 가족이 당신의 진로에 준 영향을 서술하시오."를 만나면 저도 모르게 몸이 굳었다. 흔해빠진 문장, "엄부자모(엄하신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 란 서술 속에 꾹꾹 속내를 눌렀다. 남들의 잘 쓴 예시를 볼 때마다 저 문장은 내게 허용된 문장이 아니란 생각만 들었다. 자소서는 허위와 가식을 양념 쳐 쓴다고는 해도 나는 감히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한마디도 쓸 수 없었다. 내게 아버지의 직업적 성공, 아버지의 경제적 영향력에 대한 사회적 평판은 집안에서의 폭력적 모습을 덮을 수 없는 것이었다.
아버지를 지우려고 최선을 다해보아도 내 유년기를 지배하는 건 바로 그 폭력적인 모습이었다. 흰 도화지 위의 검은 점처럼 흰 부분을 보려 해도 저절로 시선이 얼룩진 흔적으로 향하고 만다. 내 소심한 성격, 맞지 않기 위해 지나치게 눈치를 보는 부분, 방어적인 태도, 지금의 공백기, 갑작스럽게 지방으로 이주하고 전입신고조차 못하고 지원조차 받지 못한 배경.. 그 과거는 좋으나 싫으나 지금의 나를 만들고 아직도 내 현재를 지배하고 있다.
현재의 취직 시장이 원하는 "안정된 집안에서 모난 데 없는 성격"을 가진 사람이 부럽지만, "불안정한 환경"에서 피어나는 것 또한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나는 내 어머니가 그 환경 속에서 꾸준히 노력한 점을 존경한다. 자소서에 솔직하게 쓸 수만 있었다면 백 번 천 번 썼을 텐데, 아쉽게도 이곳에서나마 써본다.
내 어머니는 위기를 대비하는 사람이다. 아버지는 본인이 화가 날 때마다 생활비를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생활비 안에는 내 교육비와 용돈은 물론 공과금이 포함된 돈인데 항상 턱없이 적은 양을 주곤 했다. 어머니는 그 적은 돈을 굉장히 꼼꼼하게 관리했다. 항상 가계부를 쓰고, 아낄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아꼈다. 그 아낄 수 있는 부분이란 건 어머니 본인과 관련된 지출이었다. 1년에 코트 한 벌도 안 사고, 미용실도 거의 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내색하지 않았다. 나와 관련된 지출은 어떻게든 수를 냈다. 나중에는 잔돈을 모아 작게 투자도 하고 내게도 청약통장을 미리 만들어 주는 등 내게 경제와 금융감각을 새겨주었다.
어머니는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었다. 몇 십 년간 몇 번이고 똑같이 반복되는 폭력의 굴레 속에서도 어머니는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나는 싸우고 나서도 아버지옷을 고르는 그 모습이 화가 나서 너무 싫었다. 그렇지만 어머니에겐 그게 사람이 사람에게 해야 하는 예의였다. 지금의 상황이 어떻든 어머니는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아버지를 변하게 하려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고, 그 후에야 포기하셨다. 그 책임감이 그분을 더 괴롭게 한 점인지도 모르지만 끝까지 버티는 끈기는 존경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끈기로 나도 포기하지 않아 주셨다. 면접마다 연락해서 불안정한 마음을 쏟았을 때마다 어머니는 한결같이 나를 지지해 주었다. 아버지였으면 대번에 한심해하고 버려버렸을 텐데 어머니는 한결같이 잘될 거라고 말해주신다. 떨어질 때마다 불안한 정신을 매번 다독여준다. 몇 번이고 우는 소리를 해도 싫은 내색 없이 들어주셨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자소서를 쓸지, 몇 번이나 더 거짓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 애매한 가정환경에도 항상 빛나는 점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많이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