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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초 May 06. 2023

"우울하진 않은데 불안하고 무기력해요."

#정신과초진후기 #심리검사 #가정폭력

 정신과 *초진(해당 진료과에서 처음으로 하는 진찰)은 번지점프와 같다. 목 끝까지 올라온 감정을 꾹꾹 눌러 담은 채, 아무렇지 않은 듯이 병원을 찾아간다. 감정은 벼랑 끝인데 의사는 차분하다. 내 모든 걸 토해내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고, 말할 때마다 바닥으로 감정은 곤두박질친다. 의사가 내 발목을 붙잡고 잡아주길 기대하지만 번번이 감정은 증상이 되지 못하고 사라진다. 내 첫 정신과 방문도 그랬다.


 나는 작년 가을에 처음으로 병원을 찾아갔다. 하늘은 맑았고, 햇살은 따뜻했다. 더없이 좋은 나들이날이었지만 내 마음은 깜깜한 밤을 헤매는 듯했다. 기묘한 불안이 내 머리 위에 드리워있었다. 감정은 반반이었다. 내가 이렇게 힘들다는 게 진실이라는 걸 병적으로 확인받고 싶은 반면 정신병자가 되고 싶지 않은 기묘한 감정이었다. 의사를 대하는 내 태도도 그 사이 양극을 오갈 수밖에 없었다.


 평일 오전에도 30분가량 대기를 한 이후에 작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사무실은 깔끔했고, 40대 중반쯤 되는 의사가 편하게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앉아있었다. 나는 원목 테이블에 몸을 기대고 의사와 마주 앉았다. 의사는 문을 등지고 앉았고 나는 의사와 마주 앉아서 문을 잠시 흘끗거렸다. 닫힌 문 너머로 누군가 들어올 것 같진 않았다. 어디까지 말할 수 있을지 천천히 가늠하면서 증상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무기력해요. 하루종일 아무것도 못할 때가 있어요. 무슨 감정인지도 모르겠는데 그게 며칠을 갈 때도 있어요. 그 주기가 점점 짧아지는 것 같아요."


 내가 토해내는 증상에 비해 의사는 이런 사례를 정말 많이 보았다는 듯 침착하게 설문지 하나를 내 앞에 내밀었다. 20문항 정도 되는 설문이었고 내용은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잠을 못 자냐, 우울하냐, 어느 정도 우울하냐, 죽고 싶은 적이 있냐, 밥을 잘 못 먹냐 등등. 나는 그 모든 대답들에 부정의 답들을 내렸다. 하나같이 나와는 별로 관계가 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의사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잠을 너무 많이 자는 건 상관없나요?"


상관없이 체크하라는 응답이 돌아왔고 나는 그대로 적었다. 의사는 설문을 쓱 보더니 내게 우울감이 조금 있는데 약을 먹어도, 먹지 않아도 되니 내 뜻대로 하라고 말했다. 나는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 주기가 점점 짧아진다는 이야기, 우울감이나 그런 무기력을 겪은 지 벌써 몇 년이 지났다는 이야기를 더 말했으나 의사는 정말 이 모든 걸 심각하게 보지는 않는 느낌이었다. 나는 약을 받지 않고 병원을 나왔고 그걸 후회하는 1년을 다시 보내고야 새로운 병원을 찾았다.


 그 1년간 나는 정말 정말 힘들었다. 취업이 안 되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지만 미래를 생각할 수가 없었다. 새로운 일들을 종종 찾기는 했지만 장기적인 일이 되지는 않았고 새로운 계획을 세워야 했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한 달에 3일은 누워서 숨만 쉬며 보냈다. 머리는 점점 둔해져 바보가 돼 가는 것만 같았다. 짧은 단기근무를 끝낸 후 나는 이대로 살 수 없다는 생각을 다시 했다. 정말, 바뀌어야 했다. 내외적인 정비가 필요했다.


 지난 정신과 방문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 병원은 신중히 골랐다. 버스를 타고 나가야 하는 외진 곳에 있는 병원이었지만, 병동이 딸린 정신과 전문 병원이었다. 전문의도 4명 정도 있는 대형병원으로 지역 내에서 유명하다고 했다. 예약이 아예 안 되는 곳이라 아침 일찍 문 여는 시간 이전에 도착해서 미리 명부 작성하고 대기했지만 2시간 정도 지나서야 진료를 볼 수 있었다. 


 작은 소동네에 있는 정신병원치고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연령대는 어르신부터 아이까지 다양했다. 사람들은 조용히 TV나 휴대폰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대기실은 정말 조용해서 처음 온 나는 오히려 무섭게 느껴졌다. 서로에 대한 대화가 전혀 없었고 웃음도 찾기 힘들었다. 그러나 1시간쯤 지나자 점차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서로 조곤조곤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정말 평범했다. 모두, 평범하게 정신과에 모였다. 


 2시간 후, 나는 작은 사무실로 들어갔다. 구조는 처음 찾은 병원의 사무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이번에는 내가 문을 등지고 앉아 의사와 마주했다. 작년 정신과 방문 후 약을 받지 않고 돌아오는 길에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이미 의사에 대한 내 기대치를 낮춘 상태였다. 지난 경험으로 나는 정신과에 대해 다양한 내용을 이미 찾아보았다. 정신과는 상담센터와는 달리 약물을 처방하는 곳이고, 원인보다는 현재 상태에 집중하기 때문에 길게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증상 위주로 차근차근 말하자고 노트에 할 말을 작성해 갔다.


 그러나 막상 의사의 질문 앞에서 나는 노트는 잊어버리고 서툴게 속사정을 드러내고 말았다. 의사 선생님은 이전의 형식적인 "어디가 얼마나 우울하나요?" 같은 질문이나 "밥은 잘 먹고, 잠은 잘 자나요?" 하는 질문 대신 내 일상을 물어보셨다. "이곳에 산 지 얼마나 되었나요? 학교는 졸업했어요?" 같은 일상적이고 덤덤한 질문에 오히려 마음의 벽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나는 결국 도망쳐 나온 현실에 대해서, 어릴 때부터 목격한 아버지의 폭력에 대해서도 말해버렸다. 


 정말 놀라운 것은, 입 밖으로 "아버지"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눈물이 툭 하고 떨어진 것이었다. 나는 이미 그것들에 대해서는 털어버린 줄 알았다. 현재진행형으로 두려운 존재이긴 했으나 울 만한 존재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울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우는 사람을 얼마나 많이 보신 걸까? 차분하게 휴지를 건네주어 그것을 꼭 잡았다. 


 어린 시절 목격한 폭력은 아이에게는 본인이 당한 것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기질적인 문제도 있지만 불안하게 성장한 환경이 현재의 불안을 만든 걸 수도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 정확한 진단을 위해 심리검사를 진행했고, 그 결과 딱 두 가지 수치만 굉장히 높게 나타났다. "불안""회피"였다. 회피는 내 일종의 방어기제였고, 불안은 뿌리 깊게 내려있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무기력할 때도, 사실 속으로는 계속 불안했다. 다만 정확히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모르고 도망치려고만 애쓰다 보니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일종의 패닉상태였다.


 불안과 달리 우울함에 대한 척도는 매우 낮은 편이었는데, 의사 선생님은 내가 우울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라고 하셨다. 정확히는 우울하다고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로, 불안이 매우 높게 정신의 기저에서 작용하다가 불쑥불쑥 올라오는 것 같다고 했다. 명확하게 "약을 먹어야 할 것 같은데 혹시 거부감이 있는지" 여쭤보셨고, 나는 이번에는 괜찮다고 먹겠다고 답했다.


 검사와 약값, 진료비로 꽤 많이 지출되었고 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건강보험에 F코드가 뜰 것이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변해야 했다.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가장 씁쓸하면서도 기뻤던 점은 내가 생각하고 느꼈던 것들이 의학적으로 인정받은 것이었다. 실제로 내가 이런 문제들로 고통받고 있다는 걸 타인에게 이해받은 느낌이기도 했고, 설명을 들으면서 문제가 조금 더 명확해져서 좋았다. 더욱이, 약물을 통해서 어느 정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점도 기뻤다. 물론 내 인생이고, 내 문제인 만큼 변하고자 하는 의지도 중요하겠지만, 보조적인 도움이 절실했다.


 혹시 나와 비슷한 경험을 겪고, 똑같이 우울감 없는 이유 모를 불안에 잠겨있다면 정신과를 방문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 다만 잘 알아보고 방문해야 하며 혹시 괜찮다면 심리검사를 진행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나는 MMPI2, TCI, SCT(문장완성검사)라는 세 가지 검사를 진행했고 해설까지 6만 원 정도 들었다. 이후 정신과 약물처방은 보험적용하여 2만 원 정도 들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다면 복지제도를 찾아보는 것도 좋다. 특히 대학생이라면 위의 검사들은 대부분 대학심리상담센터에서 무료로 진행할 수 있다. 또한, 지역 내 정신건강복지센터를 통해 다양한 정보를 얻거나 상담을 진행해 보는 것도 좋다. 그러나 한편으로, 위의 두 가지를 이미 해 본 경험 아래서 말하자면 좋은 정신병원을 방문했을 때는 무료검사보다 훨씬 심도 있는 검사와 지속적인 상태검토가 가능하며 무엇보다 덜 의례적인 느낌이라 좋았다. 


 물론 내 첫 정신과경험에서 보았듯이 의사나 상담사도 정말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그러니 한 번만으로 포기하지 말고, 다른 의사를 만나보아야 한다. 물론 당시의 온 힘을 다한 용기가 부정당했을 때 심리적 거부감이 더욱 커지는 것도 사실이고 금액적인 부담도 만만치 않다. 그렇지만, 나는 보험을 적용해도 상당히 많은 금액이 들었지만 오히려 이제야 방문한 걸 후회할 정도로 만족하고 있다. 약물이 잘 드는지는 지속적으로 살펴봐야겠지만 구체적인 진단을 받고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꼬인 속마음이 좀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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