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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룡 Oct 26. 2024

인생무상(人生無常)

인생무상(人生無常이다.

   

   영철 씨는 지금 서해바다 수평선에 펼쳐지는 붉은 노을을 바라보고 있다. 애써 “아름답다.”를 되 내이고 있지만, 뻥 뚫린 마음 한 구석으로 공허함이 파도처럼 밀려들고 있음을 느꼈다.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어허 참. 인생무상이다.”라는 말을 한숨처럼 내 뱉고 말았다. 아름다운 노을을 보는 영철 씨의 표정은 허무함과 쓸쓸함으로 가득 차올랐다. “도대체 뭐지? 평생 열심히 살았고, 이루고 싶은 것도 이루며 나름 성공한 인생이라 생각했는데...”라고 중얼 거리다가 저만치 생기발랄한 젊은 남녀 한 쌍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들은 하하 호호하며 식어가는 태양을 손바닥위에 올려놓는 사진을 찍는다고 부산을 떨고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장난스럽게 술래잡기로 모래사장을 함께 나뒹군다. 조용하다 싶어 살펴보니 어느새 노을 앞에 고개 숙이고 내일의 희망을 기원하고 있다. 영철 씨는 저 젊은이들처럼 나도 아름다운 노을을 즐기고 희망을 노래했었는데 지금은 지는 해를 바라보며 인생무상을 곱씹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뭐지? 무엇이 잘못되었지?”하며 생각 속으로 깊숙이 빨려 들어갔다.


격포 앞바다의 노을


   사실 영철 씨는 이런 사치스러운 생각을 할 겨를 도 없이 살았다. 입시에서 살아남고 행정고시에 합격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부터는 고위공무원으로 승진해야했고 결국 차관까지 올라가는데 성공했다. 평생 성실하고 책임감 있으며 능력이 뛰어나다는 칭찬을 들으며 살았다. 마침내 영철 씨는 대과없이 소임을 마치고 훈장수훈과 함께 정년퇴임을 했다. 나름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고 자부하고 있고, 그에 상응하는 넉넉한 연금도 받고 있다. 아이들도 훌륭하게 자라 원하는 직장에서 충실하게 역할을 다 하고 있다. 이제 사랑하는 부인과 여유롭게 오늘처럼 여행 다니며 인생을 즐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영철 씨는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며 인생무상이라는 말을 푸념처럼 내뱉고 있다. 


   사실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사람의 삶은 항상 그러하지 않다.’라는 뜻으로, 세상을 살다보면 나와 인연을 맺는 모든 것, 심지어 나 자신 조차도 변하치 않고 영원한 것은 없으니 순간에 집착하지 말고 세상의 순리대로 살자는 말이 아니던가?  그런데 왜 영철 씨는 인생이 허무하다고 느끼고 있고, 이를 인생무상이라는 말로 위로하고 있는 걸까?


   영철 씨가 먼저 인생무상에 대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신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허무주의적 정서로 해석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항상 그러하지 않다.’라는 말을 우리 삶이 영원하지 않고 늙어가다가 언젠가는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허무한 운명에 방점을 찍어 버린다. 여기에 더해 살아가는 과정에서도 한번 좋으면 계속 좋기만 하거나 또 나쁘면 나쁘기만 하는 영원한 것이 아니어서, 우리 삶의 미래를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아무리 권세와 명예가 있고 부귀영화를 누린들 이는 한순간일 뿐 결국은 덧없고 허무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잘못된 생각으로 젊은이들이 이에 빠져들면 삶의 목적과 의지를 상실하고 허무주의에 빠져 방황하며 인생을 낭비하게 되고, 삶을 살만큼 살아낸 영철 씨처럼 늙은이들은 황혼이 석양의 노을처럼 아름답지 않고 온통 후회와 공허함에 사로잡혀 쓸쓸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영철 씨는 “결국 욕심이 문제로구나.”하고 무언가 깨달은 듯 속삭였다. 욕심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욕심껏 이루어낸 것들이 영원히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허무함을 느끼고 인생무상을 외치는 것이다.


쓸쓸한(?) 이미지        출처 Unsplash 


인생무상(人生無常)은 허무함이 아니다.


   그렇다. 인생무상은 허무함이 아니다. 허무함을 느낄 때 마다 인생무상으로 퉁치고 있을 뿐이다. 영철 씨는 인생무상의 본래 뜻대로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니 순간에 집착하지 말고 순리대로 살아 보자고 다짐했다. 그런데 영철 씨는 여전히 인생이 허무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왜 일까? 쇼펜하우어나 니체의 철학에서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고통이라고 단언한다. 그 이유는 인간이 생존을 위한 욕망을 기본 속성으로 갖고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욕망 때문이라는 것이다. 욕망은 처음엔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의식주에서부터 출발하지만, 욕망은 끝이 없이 무한하여서 이를 충족하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좌절의 고통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이러한 고통의 늪 속에서 좌절과 권태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금욕주의, 자연과 예술의 심취, 그리고 철학적 삶의 지혜를 제시하였다. 하지만 영철 씨는 쇼펜하우어의 금욕주의는 우리의 본성인 욕망을 억지로 억누르는 더 강력한 의지가 필요하고, 자연과 예술에의 심취는 아름다움을 즐기는 순간순간의 일시적인 것이며, 철학적 삶의 지혜로 사는 것은 우리가 칸트의 순수실천이성을 갖지 못하는 것에서 그 한계를 갖고 있다고 생각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니체는 어떠한가? 니체는 삶에 대한 소극적인 자세를 취한 쇼펜하우어와 달리 자신만의 삶을 개척할 수 있는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초인(Übermensch)의 삶을 피력하였다. 초인의 목적과 의지를 가지고 삶을 충실하게 살아 자신만의 가치를 창조하라고 강조한다. 물론 현실의 삶은 우연의 영역이 있어 예측불가하고 자신의 의지대로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두렵고 고통스럽지만, 초인의 사상으로 우연을 두려워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거침없이 나아가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라고 설파 한다. 한마디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하라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진정한 초인이 되기 위해서는 문화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억누르는 규율권력을 과감하게 거부하고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한 자신만의 가치로 삶을 살라고 이야기 한다. 영철 씨처럼 비교적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내고도 은퇴 후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처럼 자기 자신의 삶을 살기 보다는 세상의 규율권력에 맞추어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영철 씨는 이러한 니체의 설명에 “아하. 그래서 공허했구나.”하고 무릎을 치다가,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세상의 규율권력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자유의지로 자신만의 가치를 창조하며 살면, 은퇴 후 공허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영철 씨가 허무함을 느끼는 것은 자신이 성취한 것을 자신이 영원히 가질 수 없다는 데서 오는 것인데 말이다. 초인의 의지로 성취한 것은 자신이 소유할 수 없어도 허무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저물어 가는 것이 아니라 여물어 지는 것이다.


   영철 씨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잔디밭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며 일하는 개미들을 바라보았다. 쉼 없이 꽃을 찾아다니며 꿀을 나르는 꿀벌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이 가을, 나무에 주렁주렁 열려있는 과일을 바라보았다. 때가되면 저 과일들도, 나뭇잎들도 내려놓겠지...  영철 씨는 무릎을 치며 말했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네.”


   세상의 첫 번째 이치는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부지런하게 일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밥값을 하며 밥을 먹고 산다. 딱 여기 까지다. 그런데 유일하게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 된 인간은 여기서 만족하지 못한다. 욕망이 끝이 없다. 농장을 만들고 냉장고를 만들어 버린다. 충분히 먹고도 더 먹어 성인병 치료하러 병원에 다닌다. 그러면서도 밥값을 하지 않고 사는 꿈을 꾼다. 일하지 않고 먹고, 마시고, 놀 수 있는 유한계급(Leisure Class)을 꿈꾼다. 왕자와 공주, 귀족, 재벌, 권력자가 되기 위해 무한경쟁을 하고 사생결단의 노력을 한다. 성공하면 다행(?)이지만, 실패하면 삶이 고통일 수밖에 없다. 유한계급(Leisure Class)은 절대 다수의 희생위에 극소수만이 호사를 누리며 산다. 이럴수록 절대다수는 유한계급이 되기 위해 목을 매단다. 하지만 심지어 그렇게 원하던 유한계급이 되어도 우리는 만족할 수 없다. 또 다른 더 큰 욕망이 기다리고 있기때문이다. 이러한 욕망 꼬꼬무가 시지프스의 바위 올리기 형벌처럼 악순환의 고통에 우리를 빠뜨리는 것이다. 이제 욕망 꼬꼬무를 과감하게 끊고 적당히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만족(滿足)은 자신의 욕망을 머리끝까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발()까지 채우는 것이 만족이다. 이것이 세상의 첫 번째 이치이다.


 

시지프스의 형벌    출처: 게임 “Rock of Ages”의 한 장면


   세상의 두 번째 이치는 물은 바다가 목표라서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열심히 살다보니 어느덧 바다에 이르는 것이다. 즉, 세상과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사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유일하게 세상의 의지가 아니라 자신의 자유의지로 살아가려는 욕망이 있다. 이렇게 자신의 자유의지로 살아가는 우리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성취한 모든 결과물이 당연히 자신의 것이라 생각 한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의 규율권력에 억매인 의지로 살아가든, 니체의 초인의 의지로 살아가든 자신이 성취한 것은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은퇴 후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세상이 허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이러한 세상 속에 사는 인간의 삶도 인생무상(人生無常)이다. 세상에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이 없는데, 한 순간에, 욕심에 애착, 집착하면 삶이 고통스럽고 허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일 나무 이미지      출처 PNG Tree


   영철 씨는 여기서 호흡을 한번 가다듬고 나무에 열린 과일을 올려다보며 생각한다. 저 과일들은 지난봄부터 뜨거운 여름을 거쳐 이 가을에 이르기 까지 저 나무가 온갖 노력을 다해 만들었지만 때가 되면 아낌없이 내려놓는다. 나뭇잎 까지도... 내 소유라고 담장치고 발 앞에 모아 놓지도 않는다. 바람이 불어 자연스럽게 흩어지고 굴러가도 조용히 바라볼 뿐 말이 없다. 저물어 가는 것이 여물어지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나무는 사라질 테지만, 씨앗은 조용히 여물어 다시 나무로 자라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두 번째 이치이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무상함을 따라 물이 흐르는 것처럼 살라는 것이다. 


   영철 씨는 세상의 이치대로 사는 것에 대해 정리하면서 어디선가 들었던 “우리가 아는 것 중 가장 확실한 3 가지”가 떠올랐다. 이는 바로 “첫째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둘째 혼자 죽는다. 셋째 빈손으로 간다.”이다. 영철 씨는 “그래. 맞아”하면서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우리는 언젠가는 죽고, 죽을 때 빈손으로 간다. 자신이 이 땅에서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갖고 있든, 다 내려놓고 저 나무들처럼 빈손으로 간다. 이렇게 정리가 다 되었다고 하는 순간 영철 씨는 “아니, 그럼 삶의 가치는?”하고 또 다른 화두가 떠올랐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세상을 사는 거지? 물처럼 자신의 의지가 아닌 세상의 의지대로 살면, 삶의 의미가 있긴 하는 거야? 이제 사르트르에게 의지할 차례인가 보다. 사르트르는 니체의 초인 사상에서 한발 더 나아가 실존하고 있는 스스로 존엄한 자신과 역시 스스로 존엄한 타인 사이의 관계, 즉 연대에 대하여 설파하였다. 


   사실 이 연대에 대한 이야기는 어려운 철학적 사상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부처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정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부처님이 유한계급, 그 중에서도 최상위 계급인 왕국의 왕자자리를 뿌리치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세상 속으로 나온 이유, 예수님이 섬김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한 가르침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사르트르의 연대, 즉 존엄한 자신과 역시 존엄한 타인과의 관계에서의 핵심이고 나아가 자신과 세상과의 관계로 확장되는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흐르는 물이 단순히 세상의 의지대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흘러가면서 세상의 모든 생명체를 살리면서도 공치사 한마디 안하고 묵묵히 흐르지 않는가?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섬김의 가르침 아닐까? 영철 씨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아마도 영철 씨는 허무한 생각일랑 접어 버리고 당장 손 걷어 부치고 설거지부터 시작하지 않을까?  


제행무상이요인생무상이다

흐르는 물처럼

매순간 성실하게 일하고 

욕심을 줄여 적당히 만족할 줄 알아서

인생을 즐기며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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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나의 브런치 북 나뚜라(Natura)”

      제 20 화  “3.3 가야 할 길() : 존엄성 회복을 참고 하였습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hyuns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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