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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jiney Mar 31. 2024

발레와 샤넬, 전지적 코코 시점

Sujiney의 발레로운 매거진 10회

나, 샤넬. 반가워.

이름이야 뭐로 불러도 상관없어. 가브리엘은 내게 주어진 이름이고, 코코(Coco)는 내가 만든 이름. 변하지 않는 건, 내 성(姓) 샤넬은 내 덕에 불멸의 이름이 됐다는 거지. 날 버린 아버지의 성이 나 덕에 영원하다니, 인생이란 우스워.   

이 매체, Sujiney의 발레로운 매거진에선 발레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거겠지.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패션과 스타일, 향수 등 여성의 아름다움을 위한 노력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해 보면 되겠어.

https://m.blog.naver.com/writer_ballet_home/223393427871

https://m.blog.naver.com/writer_ballet_home/223387922932

가브리엘 샤넬. by Sujiney


난 발레를 사랑했어. 발레 의상도 디자인했지. 사실 나는 진정 좋은 옷이 갖춰야 할 미덕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어.

"제대로 만들어진 옷은 착용을 하고 걷는 것은 물론, 춤을 출 수도 있어야 하며, 승마에도 문제가 없어야 한다."

옷은 자유를 줘야 해. 내가 평생 추구한 최고의 가치 중 하나, 그건 바로 자유.     


여성을 코르셋에서 해방시킨 샤넬. 출처 구글


발레는 내게 아름다운 자유로움이었어.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쓰면서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표현하는 예술이라니. 자유와 아름다움, 우아함의 접점은 나를 사로잡았지.

이사도라 던컨이라는 무용수,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독자라면 알 것 같은데. 맨발의 현대무용가로도 유명한 그는 원래 발레 무용수였지. 그리고 나는 그와 발레 클래스를 듣기도 했어. 물론, 내가 프로로 활약할 곳은 발레 무대보다는 패션 런웨이라는 건, 오래가지 않아 깨달았지만. 나도 일종의 성인 취미발레인이었던 셈이라 할 수 있겠군.  


아이콘이 된 샤넬.


각설하고, 바쁘디 바쁜 내가 발레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이거야. 나는 알다시피 맨손으로, 홀로 패션 제국을 이뤘어. 모든 전설적 경영인이 그러하듯, 부침과 곡절도 겪었지.


발레를 만난 건 대략 1920년대 초라고 할 수 있어. 당시 나는 사업을 위해서도, 사교를 위해서도 한 클럽에 자주 갔어. 당시에 우린 그런 곳을 카바레(cabaret)라고 불렀지만, 요즘 식으로 말하면 그냥, 회원제 사교 클럽 정도. 이름이 좀 특이해. '지붕 위의 소.' 뭐 이름이야 뭐가 중요해. 그 클럽에 왔던 사람들이 중요하지. 이름을 열거할 테니 들어봐.

장 콕토(Jean Cocteau), 세르게이 디아길레프(Sergei Diaghilev),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당대를 풍미한 영화감독인 콕토. 발레 뤼스(le Ballet Russe)라는 러시아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유럽 및 미국 각지에서 활약한 발레단을 이끈 디아길레프. 그의 음악적 동지이자 나중에 나와 사랑에 빠진 현대음악의 거장, 스트라빈스키. 이들과 교류하며 나는 진정 즐거웠어.          



우리 러브스토리는 영화가 됐어. '샤넬과 스트라빈스키'. 출처 네이버, 저작권 해당 영화사



디아길레프와 스트라빈스키의 그 유명한 혁신적 발레 작품, '봄의 제전'에 얽힌 일화 하나 들려줄까 해.


어느 날 세르게이가 그러더군. 굉장한, 틀을 깨는 발레 작품으로 세상을 놀라게 할 준비를 마쳤는데, 문제는 돈이라고. 연출과 안무는 바츨라프 니진스키. 역시 나의 절친이야.


발레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건 돈이 엄청 들어. 나의 친구가 그렇게 고민하는데, 내가 가진 경제적 자유를 활용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지. 당시론 꽤나 거금이었던 30만 프랑을 건넸어.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프랑스 프랑은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다며? 대략 환전하면 3억 정도 되지 않을까 싶군.


사실 발레를 배우고, 발레 예술가들과 어울리고, 발레 작품을 보러 가면서 나는 자연스레 발레 의상 디자인에도 눈을 떴지. 그래서 1922년부터 1939년까지, 나는 다양한 발레 작품의 의상 디자인을 맡았어. 대표작이 '푸른 열차(Le Train Bleu)'라는 작품이야. 아래 사진은 한국 동글출판사가 펴내고, 이탈리아계 저널리스트가 써낸 책 <<샤넬: 자유, 사랑 그리고 미학>>에서 발췌한 거지.



오른쪽은 샤넬의 명언으로 직접 만들어본 갤럭시 플립 케이스. 혹 구매의사 있으신가요? 작가에게 제안하기 버튼 꾹! by Sujiney



'푸른 열차'는 대성공을 거두었어. 발레 의상이라고 하면 흔히 떠오르는 튀튀(tutu)는 일부러 뺐어. 대신 내가 디자이너 초년병 시절 활용했던 저지(jersey) 등, 간편하면서도 움직임을 자유롭게 하는 원단을 썼지.


이 작품이 처음으로 무대에 오른 1924년 6월 13일 밤을 잊을 수 없군. 그날 객석엔 나도 물론, 나의 VIP 고객인 로스차일드(Rothchild)가 가문 일원들부터 유럽 각국의 귀족이 앉아 박수를 보냈지. 자랑스러웠어.

나아가 장 콕토가 올린 연극 무대의 의상을 맡기도 했지. 콕토는 대단한 수완가였어.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하며 나의 도움을 이끌어냈지. '안티고네'라는 그리스 신화에서 영감을 받은 연극을 올리면서.
"오이디푸스의 딸이 옷을 아무렇게나 입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샤넬 여사에게 의상을 부탁한 이유입니다."



하지만 세월은 가고, 나는 결국 예술 작품 아닌 현실 세계의 스타일을 창조하는 일에 집중하게 됐지. 나의 친구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사망한 것도 영향이 컸어. 그가 안타깝게도 세상을 등졌을 때, 그가 사랑했던 도시 이탈리아 베니스로 그의 시신을 모시고, 장례를 치른 비용을 조용히 치렀지. 그가 사랑했던 붉은 천으로 관을 장식해 주었어. 나는 블랙과 화이트만큼 아름다운 색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각자의 취향은 다르니까.

자, 이제 나, 가브리엘 코코 샤넬이 얼마나 발레를 사랑했는지 알아주기를. 그리고 잊지 마. 아름다움은 절대 포기해선 안된다는 건. 발레를 조금이라도 배워봤다면 알 거야. 아름답게 보이는 것, 쉽게 보이는 것이 실제론 얼마나 처절하고도 어려운지.


그래서일까. 내 일대기를 다룬 발레 작품, '모댄스(Modanse)' 내한 공연 소식을 들었을 땐 반가웠어. 국제 정세 때문에 취소되긴 했지만. 어서 지구에 평화가 찾아오길. 그래야 여러분들도 아래의 작품을 볼 수 있을 테니 말이야.


샤넬로 열연하는 스베틀라나 자하로바. 출처 중앙일보


생각해 봐. 세상 모든 일은 어려워. 이 세상은 힘듦으로 가득 차 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름답고 자유로워야 해. 발레를 통해 그 점을 매일 새기기를.

나는 그럼 이만 총총. Au revoir!

By Sujiney

위의 내용은 가브리엘 샤넬의 생전 인터뷰, 그에 관한 기사들, 샤넬의 공식 홈페이지, <<샤넬: 자유, 사랑 그리고 미학>>(동글디자인)을 참고해 내러티브로 구성했습니다. 무단전재 및 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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