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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jiney Jun 23. 2024

용서의 백합, 순수의 데이지, 분노의 로즈마리

Sujiney의 발레로운 매거진 20회

용서는 왜 어려울까. 용서를 하면 편해진다는 건 누구나 안다. 하지만 도대체가, 쉽지가 않지. "용서의 아이콘"인 지젤에 항상 뭔지 모를 이물감을 느꼈던 까닭.

'지젤'을 볼 때마다 운다. 하지만 납득은 되지 않는다. 지젤은 왜 알브레히트를 용서했을까. 자신을 속인 남자, 그래서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남자를, 죽음에서 지켜내는 지젤.  



알브레히트는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거리를 바꿀 수는 없는 법. 사실 나도 하고 싶다, 용서. 그래서일까, 용서의 아이콘처럼 쓰인 꽃, 백합에 마음이 갔다.

사실 '지젤'의 또 다른 조연은 꽃이다. 백합과 데이지, (꽃이라고 할 순 없지만) 로즈마리, 이 세 가지 식물이 극을 끌어가는 주요 소도구.




우선, 데이지. 지젤과 알브레히트가 처음 조우하면서 등장하는 꽃이다. 지젤이 알브레히트를 만나고 홀딱 반하고, 그래서 둘의 사랑의 행방을 꽃으로 점을 치는 장면. "그는 나를 사랑해" "사랑하지 않아"를 꽃잎 하나하나를 떼면서 확인하는데, 결과는 "사랑하지 않아"로 나온다. 꽃은 거짓말을 하지 않네. 하지만 알브레히트 나쁜 놈은 꽃잎 하나를 떼어버리고 지젤을 속인다.



'지젤' by 국립발레단



하지만 결국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알브레히트의 정혼녀가 지젤이 사는 마을에 찾아오고, 곧 사달이 벌어진다. 지젤은 알브레히트가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워낙 심장이 약했던 터라 충격에 쓰러져 죽고 만다.

2막. 그야말로 처녀귀신인 윌리가 된 지젤이 등장한다. 윌리들의 여왕은 미르타(Myrtha). 달이 휘영청 밝은 밤, 미르타는 지젤을 윌리의 일원으로 맞이한다. 그때 미르타의 손에 들린 건 로즈마리 가지.


요리에도 잘 쓰이는 로즈마리. 론도론도 요리. by Sujiney


자료 조사를 해보니, 로즈마리라는 허브는 상심을 한 나머지 죽은 젊은 연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사용됐다고 한다. 윌리는 상심을 해서 죽은 젊은 여성들이고, 그 윌리들의 여왕이니 로즈마리가 그의 상징이 된 것. 로즈마리 특유의 강렬한 향과, 강력한 생명력이 그 이유가 아닐까 미루어 짐작해본다.

어느새인가 알브레히트가 지젤의 묘에 나타나고, 미르타는 로즈마리 가지를 들고 명한다. 죽어라. 미르타 만세라고 외치는 나도 마음속으로 외친다, 죽어라 알브레히트. 하지만 지젤은 죽어서도 사랑을 한다.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남자를 죽음으로 지키기 위해 밤새 함께 춤을 춘다. 미르타는 끝까지 알브레히트에게 눈길을 주지 않지만, 결국 지젤의 순수한 사랑이 이긴다. 미르타가 들고 있던 로즈마리 가지가 꺾이는 것.


'지젤' by 유니버설발레단.


동이 터오고, 미르타와 윌리의 힘이 쇠하는 새벽이 다가온다. 이때까지 춤을 춘 지젤과 알브레히트. 지친 알브레히트에게 지젤이 다가가 동이 터오는 하늘을 가리킨다. 그리고 지젤은 사라진다. 알브레히트는 회한의 눈물을 흘린다.

그 알브레히트가 지젤의 묘에 흩뿌리는 꽃. 백합.

백합은 다양한 꽃말이 있지만, '지젤'에선 용서와 영원한 사랑, 순수한 사랑을 뜻한다.

요즘 들어 드는 생각. 지젤이 한 수 위 일수도 있겠다. 지젤은 알브레히트에게 면죄부를 준 게 아니다. 자신의 사랑이 순도 100% 임을 증명한 지젤은 오히려 도덕적 우위를 담보했고, 알브레히트를 용서했다. 용서라는 건 도덕적 우위에 있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할 수 있는 행위다.

'지젤' by 국립발레단'


그렇다고 해서 용서를 할 준비가 된 건 아니다. 하지만, '지젤'의 백합을 내 몸에 새기고 싶어 타투를 했다. 이렇게.

개인적으로 어려운 포지션인 에카르테 드방을 할 때, 둬야 하는 시선의 방향에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그전에 본진 발레조아 정혜연 선생님께 펜으로 찍어달라고 말씀드린 팔뚝 부분에.

매일의 발레 클래스를 하며 보게 된다. 나의 백합. 그러면서 기도한다. 나도 언젠가 용서라는 것을 할 준비가 되기를. 나의 로즈마리 가지도 꺾이기를. 그리하여 분노의 족쇄로부터 해방되기를.

진정, 자유로워지기를.

By Suji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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