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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 바(barre), 이제 우리 헤어져

Sujiney의 발레로운 매거진 70화

by Sujiney

사랑했던 남자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자기는 발레 바(barre) 같아. 든든해. 고마워."

돌이켜보면, 이 사고방식이 결별을 제촉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에게 너무 기댔기 때문. 나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그와 우리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을터. 물론, 이별의 이유는 2만6277가지 정도 되지만.



발레 바에 대한 간략한 설명부터. 발레 클래스는 크게 두 흐름으로 이뤄진다. 주로 금속 또는 목재 재질의 바(아래 사진)를 나란히 놓고, 그 바에 각자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서 선생님이 내주시는 순서에 맞춰 동작을 한다. 바를 잡고 하기에 바워크(barre work)라고 불린다. 이 순서가 끝나면 살짝 스트레칭을 하고, 바를 치운다. 바 없이 홀로서기를 하는 것. 이걸 센터워크(center work)라고 부른다.


바워크. 사진 출처 및 저작권 Chacott Japan Instagram
센터워크. 사진 출처 및 저작권 Chacott Japan Instagram


문제는, 바워크에서 바를 너무 믿고 의지한다는 데 있다. 내가 내 중심을 잡지 않고 바에 의지해서 바 중심으로 서고 돌고 업을서는 것. 선생님들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까닭이다.

"바가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움켜쥐는 게 아니라, 살짝 손을 얹어 놓는 겁니다." (이승용 선생님)


"발레 바와 너무 친하면 안 돼요. 거리를 두세요. 살짝얹어놓는 정도로요." (윤오성 선생님)

급기야 이런 말씀까지.
"여러분, 발레 바와 헤어지세요, 그녀석은 나쁜 남자라고 생각해요." (정훈일 선생님)


더시티발레 벽. 아름답다. By Sujiney



바워크는 센터워크를 위한 전주와 비슷하다. 최시몬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했다.


"센터워크는 바워크의 성적표에요. 바워크에서 얼마나 내가 내 중심을 찾았는지에 따라 센터워크에서도 중심을 잡을 수 있죠. 바에 의지해서 바 중심으로 바워크를 했다면 센터워크에선 밸런스를 잡을 수 없습니다."(최시몬 선생님)

시몬 선생님은 심지어 바워크에서 를르베 업, 쉽게 말해 까치발을 서고 밸런스를 잡을 때, 갑자기 바를 치우시기도 한다. 바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생각보다 잘 서 있을 수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돌이켜보면 아마 먼 옛날 사랑했던 그와의 관계에서도 나는 그에게 너무 의지했겠지. 결국 관계에 있어서도 일정한 서로 간의 거리는 필요하다. 그래야 숨을 쉴 수 있고, 바람이 통하니까.

하지만 솔직히, 말이 쉽지. 모든 이별이 그렇듯, 발레 바와의 이별도 쉽진 않다. 아직도 나도 모르게 바를 움켜쥐고 한껏 의지하며 낑낑대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그래도 잘못된 걸 깨달은 게 어딘가. 잘못된 걸 알지 못하고, 잘못된 줄도 모르고 가는 것보단 말이다.

고마운 바닥. 비너스발레학원. By Sujiney


발레 클래스에선 아직도 중심을 바에 의지하지만, 그래도 삶에선 조금씩 나만의 중심을 찾아가고 있다. 그 사랑이 지나가고, 남은 교훈이다. 인생의 중심을 나홀로 오롯이 세우게 되면서, 그전엔 몰랐던 충실한 기쁨도 감사히 맛보고 있다. 때론 외롭지만 대개 괴롭지 않다. 발레 클래스에서도, 조금씩 나만의 중심을 세우자.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By Suji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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