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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도 인생도, 내려가야 올라간다. 초조함은 금물

Sujiney의 발레로운 매거진 73화

by Sujiney

"중요한 건, 초조해하지 않는 겁니다."

영화 '안경'의 대사로 시작해 본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팥빙수를 만드는 비법을 묻는 타에코에게, 팥을 삶던 사쿠라가 하는 말.


영화 '안경' 스틸컷. 출처 네이버.


하긴, 그렇다. 팥을 삶으면서 "왜 이렇게 오래 걸리냐"라고 채근해 봤자, 팥이 "아이코 죄송합니다"라고 두 배 빨리 삶아지진 않으니까. 팥만 그럴까. 나의 쁠리에도, 나의 포인트(pointe)도, 나의 피루엣도, 발레 클래스의 나의 모든 것도 그러하다.


By Sujiney


지금은 도쿄. 알찬 건축 워크샵으로 성장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초조했다. 발레 클래스를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의 쁠리에는 하루만 하지 않아도 바로 녹슬어버릴 거 같았다. 피루엣의 타이밍도 조금이나마 감을 잡은 걸 바로 잃어버릴 것 같았다. 풀업의 고양감, 호흡을 위로 끌어올려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그 힘들지만 황홀한 감각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수 일만에 겨우 오늘, 도쿄 본진 차코트 다이칸야마 본점에서 들은 발레 클래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발레 바(barre)를 옮기면서부터 "잘해야만 해" "잘하고 말겠어"라는 초조함으로 스스로를 들볶고 있었다.


클래스를 진행해 주신 명랑하면서도 야무지신, 그러면서도 상냥했던 도히 야스코 선생님. 과하게 긴장하고 있는 나를 보며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풀업을 열심히 하겠다는 마음은 좋아요. 하지만 말이죠, '위로 올라가고 싶어, 올라가고 말 거야'라는 마음이 너무 강하면 '아래'를 잃어버리고 말아요. '위'로 올라가고 싶은 만큼, '아래'를 의식해야 합니다. 우리에겐 위도, 아래도 함께 존재하니까요. 위로 가고 싶은 만큼, 오히려 아래로 내려가 보세요."

와. 왠지 이 말을 들으며 울컥했다. 사실 발레뿐 아니라 요즘, 인생의 모든 면에서 초조했다. 세속적이기 그지없는 내게 욕심이 많아서다. 어서 돈도 더 많이 벌고 싶고, 더 인정받고 싶고, 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다. 그렇게 성취해 낸 경제적 자유와 시간적 자유를 발레라는 아름다움, 연희로운 자유로움에 쓰고 싶다. 하지만 나름 열심히는 하는 데 손에 잡히는 건 없는 마음. 무엇보다, 시간이 손 안의 모래처럼 흘러가버리는 느낌에 억울했다.


그러다 보니 더더욱 방향성은 잃은 채, 초조함에 스스로를 채찍질만 한 건 아니었을까. 위로만 올라가기 위해 아래로는 허우적거리기만 한 것은 아닐까.


하늘 높이 가지를 뻗은 나무일수록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는 것일진대, 나는 뿌리를 내릴 생각은 하지 못하고 가지를 뻗을 생각만 한 셈이다.


생각해 보면, 서울에서도 수많은 선생님들이 항상 말씀해 주셨다. 풀업의 기본은 튼튼한 축다리와 코어라는 것. 바닥을 치고 올라가려면 바닥의 힘을 받아야 한다는 것.


이승용 선생님의 이 말씀이 갑자기 생각난다.

"풀업을 제대로 하려면 그라운딩(grounding)이 중요해요. 바닥을 제대로 느끼면서, 위로 올라가지 않으면 불필요한 힘을 주게 되지요. (발끝으로 까치발을 서서 균형을 잡는) 를르베 밸런스는 사실, 온몸에 힘을 끙 주는 게 아닙니다. 바닥에 제대로 뿌리를 내린 채, 몸의 몇 가지 포인트를 확실히 잡고, 호흡을 하면서 어깨 등등엔 힘을 빼고 쉬는 거예요."


역시, 발레는 아름다움의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 세계 공용어).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선생님들의 말씀은 똑같다. 도히 야스코 선생님 역시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호흡이 정말 중요해요. 호흡을 하면서 내 몸 안의 에너지를 순환시킨다고 생각하세요. 몸에 불필요한 힘은 빼고, 몸 안에서 숨이 순환을 할 수 있어야 해요."


결국, 올라가고 싶다는 생각에 집착을 하면 안 된다는 의미일 것. 위로만 가려고 하면 결국 위로 가지 못한다. 위와 아래를 제대로 느끼고, 그 사이의 순환을 생각하며 조금씩 훈련의 시간을 쌓아나가면 성장은 어느 순간 우리 곁에 훅 와있을 거다.

By Sujiney

높이 날고 싶을수록, 뿌리를 깊게 내리자. 초조한 마음을 다스리고, 팥을 정성스레 삶은 사쿠라처럼, 나의 피루엣도 나의 쁘띠 알레그로도, 성장의 시간을 쌓아나가자. 무작정 많이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는지를 생각하면서.


By Suji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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