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아니라 짐이 살고 있었다

내 마음의 채리티 숖 이야기

by 양수경


현관문을 여는 순간 알았다. 이 집의 주인은 내가 아니었다.


3박 4일의 짧은 여행을 마치고 런던의 집으로 돌아온 날이었다.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익숙한 집 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답답함이 가슴을 눌러왔다. 신발장에는 신발이 가득하고, 부엌 찬장마다 그릇이 빈틈없이 쌓여 있다. 방문을 열자 옷장 틈새마다 옷들이 숨 쉴 구멍 없이 빽빽하게 들어차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없는 사이, 이 집을 차지하고 있던 건 내가 아니라 이 수많은 '물건'들이었다.


문득, "집이 내가 사는 곳인가, 아니면 짐이 사는 곳인가" 하는 서늘한 자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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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에서는 달랐다. 작은 기내용 캐리어 하나에 든 옷 몇 벌과 세면도구만으로 나는 충분히 먹고, 자고, 웃으며 행복했다. 에어비앤비(Airbnb) 숙소에 도착하면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우리가 사는 데 정말 필요한 그릇은 몇 개 없구나."


숙소의 부엌살림은 늘 단출하다. 접시 몇 개, 컵 몇 개.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며칠 동안 풍성한 식탁을 차려낸다. 옷도 마찬가지다. 캐리어에 바리바리 싸 들고 간 옷의 절반은 꺼내지도 않고 다시 들고 오기 일쑤다. 우리는 살아가는데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음을 여행을 떠나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그런데 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그토록 많은 불필요한 짐들을 껴안고 사는 걸까.


영국에는 동네마다 ‘채리티 숍(Charity Shop)’이 있다. 옥스팜(Oxfam)이나 영국심장재단(British Heart Foundation) 같은 자선단체에서 운영하는 중고 가게다. 사람들은 더 이상 쓰지 않지만 버리기엔 아까운 물건들을 이곳에 기부한다. 누군가의 옷장에서 잠자던 코트가 이곳을 통해 필요한 사람에게 저렴하게 팔리고, 그 수익금은 가난한 이웃을 돕거나 연구 기금으로 쓰인다. 이곳에서 물건을 비운다는 건, 쓰레기통에 처박는 ‘폐기’가 아니라, 물건의 쓰임새를 찾아 떠나보내는 우아한 ‘순환’이다.


오래전, 아프리카에서 오신 한 여자 선교사님을 공항에서 마중 나간 적이 있다. 몇 년 만에 영국에 오신 분의 짐이라고는 고작 큰 가방 하나와 작은 기내용 캐리어가 전부였다. 일주일 정도 런던의 겨울을 나셔야 했는데, 입고 오신 얇은 외투로는 도저히 런던의 칼바람을 견딜 수 없어 보였다. 내 옷을 빌려드리기엔 사이즈가 맞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는데, 선교사님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요. 동네 채리티 숍에서 하나 사면 돼요."


그녀가 채리티 숍에서 단돈 몇 파운드를 주고 산 중고 외투는 꽤 근사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값비싼 옷을 입고 무거운 짐에 짓눌려 있던 나보다, 낡은 중고 코트를 걸친 그녀가 훨씬 더 기품 있고 자유로워 보였다. 그녀에게 물건이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계급장'이 아니라, 추위를 막아주는 '도구'일뿐이었다. 도구에 집착하지 않으니 그녀는 언제든 가볍게 떠날 수 있었고, 언제든 우아하게 머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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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나는 집안을 채우고 있던 불필요한 물건들을 아주 조금씩 덜어내기 시작했다. 언젠가 살 빼면 입겠다고 쟁여둔 옷, 1+1 세일 때 샀지만 뜯지도 않은 물건들, 손님용이라며 모셔둔 그릇들. 그 물건들을 붙들고 있던 건 내 손이 아니라, 나의 ‘불안’과 ‘과거에 대한 미련’이었다. 채리티 숍에 물건을 담은 가방을 건네고 돌아오는 길, 비워진 공간만큼 내 숨통이 트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옷장뿐만이 아니었다. 내 마음의 공간도 꽉 들어찬 짐들로 숨 쉴 틈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래된 '톡식(Toxic) 관계'가 여전히 내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소설을 쓰고 있었다. 샤워를 하다가도 이미 유효기간이 지난 상처들이 불현듯 튀어나와 나를 변명하게 만들었고, 설거지를 하다가도 억울한 기억이 떠올라 씩씩거리게 만들었다. 이미 지나간 실패를 곱씹으며 "이게 너야"라고 속삭이는 소심함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나는 갤러리에 걸린 그림처럼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삶'을 사느라, 정작 내 마음이라는 공간은 쓰레기장처럼 방치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영국의 채리티 숍이 누군가에게 더 이상 필요 없는 물건을 가치 있게 순환시키는 곳이라면, 내 마음에도 그런 가게가 절실했다.


나는 이제 마음속에 작은 '마음의 채리티 숍'을 열기로 했다.


가장 먼저 "내가 왕년에는 말이야" 하며 불쑥 튀어나오는 ‘과거의 영광’이라는 코트를 꺼내 든다. 한때 이 옷은 나를 세상의 추위로부터 지켜준 근사한 갑옷이었고, 치열하게 살아온 내 인생의 훈장이었다. "그래, 나 참 열심히 잘 살았지." 나는 옷깃을 한번 쓰다듬으며 그 시절의 나를 따뜻하게 다독여준다. 하지만 인정해야 한다. 런던이라는 낯선 계절을 사는 지금의 나에게, 이 화려하고 무거운 코트는 더 이상 맞지 않는다는 것을. 입고 있으면 움직임만 둔해질 뿐이다. 나는 과거의 화려한 '타이틀'은 채리티 숍 진열대에 기꺼이 내어놓고, 대신 그 시간을 견디며 단단해진 '내공'만 챙겨 가볍게 가게를 나선다.


이어 "미래가 잘못되면 어쩌지" 하는 ‘막연한 불안’도 이제 그만 기부하기로 한다. 나를 갉아먹는 ‘해로운 관계’와 ‘죄책감’들도 미련 없이 쇼핑백에 담아 내놓는다. 내게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이 무거운 감정들이, 이곳을 떠나 내 안에서 비워지기를 바라면서.


모든 것을 움켜쥐고 지키며 사는 삶이 아니라, 때로는 나를 위해 우아하게 놓아주는 삶을 살기 위해서. 오늘도 나는 내 마음의 짐들을 챙겨, 마음속 채리티 숍으로 향한다.


비워진 그 공간에, 비로소 진짜 '나'가 들어와 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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