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칵, 여전히, 생명을 품다

내게도 구명조끼가 있었다.

by 양수경
IMG_9918.HEIC “여전히, 샘영을 품다”


가던 길을 멈추게 하는 풍경이 있다.

그날 내가 멈춰 선 곳은 얕은 연못 옆이었다. 발목조차 잠기지 않을 만큼 얕은 물가, 누구도 빠져 죽을 리 없는 자리였다. 그런데 그곳에 구명튜브가 걸려 있었다.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잘려나간 나무둥치 위, 붉은 원이 선명하게 걸려 있었다. 이미 생명을 다한 듯 보이는 나무는 여전히 구명튜브의 배경이 되어주고 있었다. 생명을 잃은 것 같지만 또 다른 생명을 살릴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 그 풍경은 오래 내 시선을 붙잡았다.




잘린 나무와 구명튜브의 대비는 묘한 역설을 만든다.

나무는 한때 무성한 가지와 잎을 뻗으며 생명력을 자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뿌리만 남은 채 멈춰 있다. 반면 구명튜브는 아직 쓰임을 기다리고 있었다.


죽음과 삶, 상실과 구원이 한 자리에 놓여 있는 풍경. 어쩌면 우리의 인생도 이와 닮아 있다. 누군가는 무너지고, 또 누군가는 그 자리에 기대어 살아난다. 위기의 순간에도 전혀 예상치 못한 손길이 다가와 우리를 건져 올리기도 한다.


스스로 다시 일어서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 스쳐간 눈빛 하나, 뜻밖의 선물이 다시 살아낼 힘을 준다. 잘린 나무가 구명튜브를 붙잡아 주듯이, 이미 지쳐버린 존재조차 또 다른 생명을 지탱하는 배경이 된다.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나는 늘 작고, 보이지 않는 아이였다. 교실에서는 존재감 없는 그림자처럼 서 있었고, 앞에 나서서 말을 꺼내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내가 잘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믿었고, 자신감은 바닥에 깔려 있었다. 누군가의 시선은 두려움이었고, 교실의 웃음소리는 종종 나를 겨냥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자습 시간이었다.

담임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

“얘가 너희에게 설명해 줄 거야.”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발걸음이 어떻게 칠판 앞으로 나갔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만약 내게 선택권이 있었다면, 분명 도망쳤을 것이다. 그러나 교실의 공기와 선생님의 시선이 나를 앞으로 밀어냈다. 손에 쥔 분필은 차갑게 식어 있었고, 심장은 귀 가까이에서 요동쳤다.


수학,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과목이었다. 두려움 반, 떨림 반으로 문제를 풀고 설명하는 동안 교실은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웠다. 놀랍게도 아이들의 눈빛은 조롱이 아니었다. 내 말이 그들에게 더 쉽게 와닿았던 걸까. 그들의 눈 속에 ‘이해했다’는 반짝임이 비쳤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내가 쓸모 있는 존재라는 것을.


그 경험은 내 인생을 바꿔놓은 구명조끼였다. 허우적대던 나를 끌어올려 숨을 돌리게 했고, 앞으로 걸어갈 길을 비춰주었다. 선생님은 나를 ‘쓸모없는 아이’에서 ‘도움이 되는 존재’로 옮겨주셨다. 그 작은 경험이 지금까지도 내 삶을 지탱해 주고 있다.


나는 조금씩 나를 믿을 수 있게 되었고, 결국 누군가에게 말씀을 전하는 사람, 그리고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는 사람이 되었다. 내 삶의 시작은 작고 보잘것없었지만, 누군가의 믿음이 내 안의 가능성을 끌어올려 주었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완전히 독립된 존재로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간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인간의 관계를 “나-너(I-Thou)”라고 표현했다. 혼자 있을 때보다, 누군가와 눈을 맞추고 응답할 때 비로소 내가 ‘나’로 선다는 뜻이다.


내가 나로 설 수 있었던 것도 선생님이라는 ‘너’를 만났기 때문이다. 부버의 사상은 내게 단순한 철학이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의 초석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사람을 만날 때마다 “이 관계 안에서 나는 누구이고,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떠올린다. 결국 인간은 서로에게 건네는 시선과 말, 그리고 손길 속에서 살아난다.


누군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지지해 줄 때, 사람은 자란다. 어쩌면 구명조끼란 이런 무조건적 수용의 상징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내 눈에는 사진 속 잘린 나무가 남아 있다.

생명력을 잃은 듯 보이지만, 그 위에 걸린 구명튜브를 지탱하고 있다. 마치 자기 역할을 다한 후에도 여전히 누군가를 지탱해 주는 사람처럼.


우리 인생에는 그런 존재들이 있다. 이미 상처 입고 쓰러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를 살려내는 사람들. 때로는 부모가, 때로는 친구가, 혹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이가 우리의 구명조끼가 되어준다.


그리고 언젠가 나 또한 그렇게 쓰러져 있을지라도, 누군가의 구명튜브를 지탱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내 삶의 상처와 경험이 헛되지 않고, 누군가를 건져내는 배경이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나는 안다.

누군가의 말, 누군가의 눈빛이 한때의 나를 건져 올렸음을.

그래서 오늘, 나도 작은 말 한마디를 건네고 싶다.


“괜찮아. 여기 네가 있잖아.”


오늘 이 말이 누군가에게 구명조끼가 된다면,

내 삶 또한 누군가를 살려낸 작은 배경이 될 것이다.




P.S.


이 글을 쓰면서 잊고 지냈던 고마운 순간들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치열했던 시간도 글 위에서는 조금 부드럽게 표현될 수 있었습니다.

글은 내 과거를 다시 불러내고, 내가 왜 지금의 삶을 살고 있는지, 무엇이 나를 빚어왔는지를 다시 보여줍니다. 돌아보니, 내 인생에는 참 많은 구명조끼들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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