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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지 Apr 03. 2017

청파동


... 이곳에서는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당신이 보고 있을 내 모습이 보인다 새실새실 웃다가도 괜히 슬프고 서러운 일들을 떠올리는 모습이 둘 다시 당신을 생각해 웃다가 여전히 슬프고 서러운 일들을 떠올리는 모습이 어덟이었다 남은 청파동 사람들이 막을 떠나가고 있었다 이제 열에 둘은 폐가고 열에 여덟은 폐허였다

박준, 2:8 -청파동2



우연히 산 시집에서 익숙한 곳의 이름을 발견한다.


나는 결국 밀려 밀려 공덕동에 정착했지만, 청파동에 숨어있는 좁고 가파른 골목들을 사랑했다. 그곳 전봇대 아랜 버려진 인형과 이불, 임신테스트기와 담배꽁초가 아무렇지 않게 한데 나뒹굴었다.


이유없이 마음이 울적하던 때, 사람 없고 흔적만 남은 골목을 누비다 동네 사진관과 태권도 학원이 거기 그 자리 그대로 있다는 걸 확인하고 발걸음을 돌리곤 했다.


여전한 것들에 마음이 놓였다. 물론 나의 공간으로 돌아가면 다시 사라질 얄팍한 안정이었으나, 그땐 그것마저 절실했다.


나는 지금도 어지러울 때면 그 동네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오늘 아침도 그랬다. 공덕동을 떠나 새로운 곳에 자리를 잡은 지금도, 그곳이 가끔 그립다.


다행인 것은 새로운 사람이 들이닥치고 썰물처럼 허무하게 빠져나가도 아직 버틸만 하다는 것. 그 골목으로 도망치지 않아도 될 만큼 아주 조금 단단해졌다는 것.


나는 걸어가기엔 멀고
무얼 타기엔 애매한 길을
누구보다 많이 갖고 있다

청파동의 밤길은 혼자 밝았다가
혼자 어두워지는 너의 얼굴이다

박준, 관음 -청파동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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