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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지 Dec 03. 2017

171203



'이해한다'는 내뱉을 때마다 뭔가 비겁하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사려깊게 상대방 말을 듣는 척하면서 결국 내 이야길하고 싶을 때 이 말을 쓰곤 한다. 그러니까, 가장 몰이해한 방식으로 '이해한다'는 말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임현의 소설에선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동일시하려는 이들이 자주 등장한다. <말하는 사람>의 문영도 마찬가지다. 글을 쓰는 그녀는 여행지에서 만난 외국인 노동자가 자신을 부러워할 것이라 짐작하며 씁쓸함을 느끼고, 가난한 친구가 자신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낄까 걱정한다. 문영은 분명 선한 사람이다. 하지만, (화자의 표현처럼) 동시에 '나쁜' 사람이기도 하다. 


"문영은 말하기 어려운 것들을 말하고 싶어 했고 그게 무엇일까,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궁금해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이르러 나는 그런 문영을 참을 수가 없었는데 너는 왜 그런 것들만 궁금해? 여름에 더운 집과 겨울에 추운 집 중 어느 것이 더 나은지, 돈을 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왜 그런 건 묻지 않아? (중략) 그런데도 왜 너는 남의 불행을 다 이해하는 사람처럼 구나, 왜 그게 네 것인 양 남의 걸 탐내나, 언젠가 내가 문영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불행에 대한 섣부른 이해와 공감은, 그리고 그것을 제멋대로 해석해 글로 옮기는 행위는 누군가에게 종종 '참을 수 없'는 일이 되고 만다. 좋은 의도가 옳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내가 너와 분명히 다른 사람이라는 한계를 잊고, 넘겨짚거나 짐작하려 들 때 오독이 시작되고 동정과 시혜의 시선이 탄생한다. 


그렇다면 이해나 공감 따위를 영영 포기해야 할까, 라고 스스로 되물어보자면 글쎄, 또 그건 아닌 것 같다. 찝찝함을 느끼면서도 나는 여전히 '이해한다'고 말한다. 기만적이지만, 말을 내뱉으면 아주 약간은 진짜 '이해'란 걸 해보려고 노력하게 되니까. '이해'의 과정에선 오독도 생기겠지만, 우연히 진심에 가닿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타인의 삶을 함부로 탐하지 않는 이해는, 꽤 의미가 있을 것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내가 '이해한다'는 말을 끝내 버리지 못하는 이유다. 


나는 문영이 밉고, 안쓰러우면서도 약간은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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