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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지 Jun 09. 2018

180609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 김숨


'그녀'는 누구보다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이다. 손님을 상대하며 없는 웃음과 친절을 쥐어짜내는 홈쇼핑 콜센터 직원 일을 15년이나 했다. 대신 집에 와선 그런 직장생활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아내듯 시어머니, 즉 '여자'에게 사사건건 불편함과 불쾌감을 토로한다. '화내고 짜증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듯이. 여자가 '구강건조증'이라는 생소한 병을 얻고 나선 그 정도가 더 심해진다. 겉보기에 그녀는 분명 많은 말을 꺼내는 사람이다. 하지만 가정에 무관심한 남편에 대한 불만, 돌아갈 자리가 없는 가난한 경력 단절 여성으로서의 불안, 분리하고 싶지만 끝내 분리될 수 없는 시어머니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선명하고 솔직하게 토해내진 못한다. 말하고 표현하지만 어딘가 공허해 보이는 이유다. 


반면, 시어머니인 여자는 말이 없다. 그나마 내뱉는 말은 완결성 있는 문장이 아니다. 엎친 데 덮친 격, 입 속의 침이 이유없이 바짝바짝 말라가 말수마저 점점 더 줄어든다.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지 않아서일까. 아들은 여자에게 냉정하리만큼 무관심하고, 며느리(그녀)는 모욕과 멸시를 일삼는다. 하루종일 바지런하고 착실하게 집안일과 육아를 도맡아 하지만 어딘가 둔하고 촌스러우며 답답한 사람. 여자는 사라져야만 비로소 제 역할과 가치를 인정받는 침과 같은 존재다. 있을 때는 눈에 띄지 않으며, 혹 그렇더라도 더럽거나 불결한 것으로 치부되는 존재. 


아무리 병원에 다녀도 침이 더 늘어나기는 커녕 줄어들어 혀가 여러 갈래갈래 찢어지는 것만 같던 어느 날, 여자는 베란다에 웅크리고 앉아 입속의 침을 힘껏 그러모은다. 그리고 어렵게 모은 그것을 제 발치쯤에 뱉어놓고 홀연 사라진다. 여자는 으리으리한 아파트를 재건축하기 위해  파놓은 공사장 구덩이에 제 발로 들어간다. 낡고 쓸모없어져 끝내 부숴진, 빌라가 있던 터다. 스스로 고려장이라도 하는 듯한 기행. '사라짐'으로서 가장 명징하게 제 존재를 증명하는 최후의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없는 침을 뱉어 모은 것도, 빌라 수도를 일부러 고장 내 전 세대를 단수 시킨 것도 마찬가지의 일이 아니었을런지. 


집에서, 직장에서 '투명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제 각기 방법으로, 슬프고도 처절하게 분투하는 여성들의 역사는 대체 언제쯤 끝날 수 있을까. 분리되어 있고 다르지만 서로를 필요로 하는 이중생물, 그녀와 여자 사이에서 남성은 무력(아들 민수)하거나 무책임(남편)하다. 분명 육아, 가사노동, 직장생활이라는 판은 함께 구성했을 텐데 어째 그 안에서 미묘한 긴장을 느끼는 건 여성들 뿐인 걸까. 왜 남성들은 그런 감정에 무감할 수 있게 됐나. 여성들이 수행하는 무형의 노동은 왜 없는 것, 혹은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되나. 적들은 그렇게나 진화하는데 여성들의 삶은 왜 닮고 닮은, 닳고 닳은 것의 반복인가. '진화하지도 멸종하지도 못한 채 화석인류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 사슬을 끊을 혁명이 오긴 오는 건가.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읽고 그 다음 장면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변화가 더디게 온다는 것을 알기에 내 마음은 늘 낙관보다 비관 쪽으로 기운다. 문득, 그녀가 4년 전 지운 아이가 혹시 여자는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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