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지 Sep 22. 2019

선의와 운에 기대지 않고도
잘살고 싶다




주말 아침부터 부동산에 다녀왔다. 11월 말이면 지금 살고 있는 원룸의 계약이 끝나기 때문이다. 계약서상으론 두 달 넘는 시간이 남았으니, 사실 이렇게까지 서두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번엔 월세가 아닌 전세를 구하고 있고, 개중에도 중소기업 청년 전세자금 대출이 가능한 방을 찾고 있어 일찍 준비를 시작했다. 물론 내 조급함과 불안함도 한몫했다.


이 동네에서 살았던 회사 선배 소개를 받아 찾아간 부동산은 공인중개사 자매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원하는 조건을 말했을 때 "그런 건 없다"며 다짜고짜 무시당하거나 터무니없는 곳을 보여주며 "이 정도면 괜찮은데 아가씨 눈이 높은 것"이라고 면박 들을 일은 없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실제 나를 담당한 공인중개사 선생님은 미리 말한 조건에 맞게 등기부등본상 문제가 없는 깔끔한 집만 세 군데 골라 보여주셨다.


다만, 나는 중소기업 대출 100%를 받는 것이 가능한 원룸을 원했는데(중소기업 청년 전세자금 대출은 80%, 100% 두 종류가 있다) 세 군데 모두 그것을 확답해주긴 어려운 상태였다. 전세자금 대출은 내가 받고 싶다고 해서 그냥 진행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집주인이 허락해줘야 한다. 그런데 대개 집주인들은 질권 설정 등의 문제 때문에 중소기업 대출 100%를 꺼려한다.


정 안 되면 80%라도 받아야 하겠지만 기존 원룸에 묶여있는 보증금과 약간의 저축금이 내 수중에 있는 돈의 전부이기 때문에 좀 불안했다. 만약 현 집주인이 이사 날짜에 맞춰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아 잔금을 제대로 치르지 못한다면? 생각만 해도 눈앞이 캄캄했다.


이런저런 걱정을 늘어놓으니, 공인중개사 선생님은 내가 가장 괜찮다고 생각했던 두 번째 원룸의 집주인을 설득해보겠다고 했다. 나라에서 청년들을 위해 하는 대출 사업이라고 잘 말하면 집주인도 허락해줄 거라고, 지난번에 '순박하게 생긴' 청년도 그렇게 했다고 말했다. 어떻게든 내 사정에 맞춰주려는 공인중개사를 만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기 때문에, 그 말이 고마웠다. 하지만 한편으론 집주인의 '선의'에 기대야만 하는 상황이 속상했다.


사실 집주인이 100% 대출에 동의한다고 해도 문제가 다 해결되는 건 아니다. 중소기업 대출을 준비하며 여러 후기를 찾아보니, 같은 사람이 같은 매물을 들고 찾아가도 은행에 따라 100% 대출을 승인해주는 곳이 있고 아닌 곳이 있다고 했다. 때문에 주거래 은행이든 아니든 여러 군데 발품을 팔아 상담을 받으라는 후기가 많았다. 또, 대부분 중소기업 대출을 진행해본 직원을 만나는 것이 훨씬 좋다고 말했다. 과정이 복잡하기 때문에 제도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담당자를 만나야 일을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오는 길, 결국 어느 정도 '운'이 필요하구나 싶어 힘이 빠졌다. 물론 중소기업 청년 전세자금 대출은 분명 좋은 제도다. 시중 은행은 말할 것도 없고, 버팀목 전세자금 대출 등에 비해 금리가 낮은데다 대출 한도도 높은 편이다. 또 대출을 하는 데 있어 일정 절차를 밟아야 하는 건 당연하고, 무작정 쉽고 빠르게 승인이 난다면 그게 더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복잡한 과정을 떠나 중소기업에 다니며 아직 전세 자금 몇 천을 모으지 못한 불쌍한 청년의 처지를 ‘이해’해주는 집주인과 공인중개사를 만나야 하고, 대출 승인 기준을 명확히 알 수 없어 여러 은행을 전전한 다음, 경험있는 직원까지 찾아야 하는 제도라면 어떤 면에서 구멍이 있는 것 아닐까 싶다.


'그정도면 감사히 여기라'는 말이 틀린 이유 


누군가는 국가가 ‘아량’을 베푸는 건데,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니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논란이 된, '5평도 감사하게 살라'는 식의 역세권 청년주택 관련 트윗도 그런 관점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그런데 그 트윗을 쓴 사람은 평수를 제쳐두고서도 역세권 청년주택의 문제점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역세권 청년주택은 국가가 임대하는 세대와 민간이 임대하는 세대가 나눠져 있는데, 민간이 임대하는 세대의 경우 소득과 지역 요건 없이 추첨을 통해 뽑고 물량도 많은 편이지만 보증금과 월세가 높다. 예를 들어 이번에 모집한 충정로 주택의 경우 청년을 위한 5평짜리(17제곱미터) 민간 임대 원룸 임대료를 보증금 비율에 따라 3990/37만원, 4650/34만원, 5310/32만원으로 책정해 놓았다.


물론 시설의 수준과 위치를 감안하면 괜찮은 편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집을 구할 목돈(보증금)이 부족한 사회초년생들을 위해 설계한 금액이라고 보긴 어렵다. 괜히 "주거 빈곤층을 위한 주택이 아니라 오피스텔 월세를 감당할 수 있는 청년계층이 수평 이동할 수 있는 하나의 주거상품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함영진 직방 데이터랩장)는 지적이 나오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공공 임대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데, 이 경우 소득 등의 요건은 그렇다치고 물량이 달리는 게 문제다.


앞서 언급한 충정로의 경우 청년 계층 몫으로 할당한 공공 임대는 딱 17세대 밖에 없었다(대학생까지 포함하면 총 30세대). 몇 세대 뽑지 않으니 경쟁률은 자연스레 올라갈 수밖에 없는데, 실제 충정로 공공 임대주택의 청약 경쟁률은 122대 1을 기록했다(민간 임대는 7대 1). 사실상 대부분의 신청자들이 탈락한다는 소리다.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무엇을 감사히 여기라는 것인가. 빨래 건조대만 펴도 생활 공간이 확 줄어드는 5평짜리 원룸에 그리 싸지 않은 보증금과 월세를 내고 사는 것에 감사하라는 건가? 아니면 로또를 사듯,  잠시나마 세자릿 수 넘어가는 경쟁률을 뚫고 혹시 당첨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라는 건가?


시작부터 완벽한 제도는 당연히 있을 수 없다. 때문에 제도가 더 나아지려면, 이를 이용하는 이들의 솔직한 평가를 가감 없이 들어야 한다. 제도의 부족함을 선의로 메꾸거나 운으로 해결하려 하고, 비판의 목소리를 모두 배부른 소리 취급하거나 무시하다 보면 문제점은 영영 시정되지 않는다. 다른 게 아니라 이것이야 말로 헛발질 정책이고, ‘세금 낭비’ 아닌가.


정말 국가를 걱정하는 이들이라면 '그 정도도 감사하게 여기라'며 손가락질 할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제도를 뜯어보고 개선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불편한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나는 선의와 운에 기대지 않고도 잘살고 싶다. 그게 좋은 나라다.

작가의 이전글 18081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