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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욕월매 Jun 20. 2022

코로나 격리병동에서 아기를 낳다 (3)


6. 갑작스런 진통과 제왕절개 결정


스르륵 잠이 들었다가도 주기적으로 오는 아픔에 정신이 들기를 반복하며 약간은 몽롱한 상태로 두어시간을 더 누워있었다. 


새벽 세 시. 내일 다시 의논하기로 했다는 내용을 전해들은 남편도 이미 잠든 시간, 깨어있는 사람이 한 명 있었으니, 바로 병원 바로 옆 조리원에서 밤중 수유를 하고 있는 언니S 였다. 비슷한 시기에 임신해 함께 아홉 달 동안 같은 길을 걸어온 언니는 멀리서나마 마음으로 손잡아주며 힘 줄때 팁까지 전수해줬다. 커다란 배를 하고 옆으로 누운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농담기 섞어 "배가 슬슬 아파오고 있는데 이게 진통일까?ㅋㅋ" 하고 ㅋㅋ거렸던 것이다.


그 뒤 부터는 카톡을 할 여유가 사라졌다. 진통은 점점 주기적으로 변했고 주기는 갈수록 짧아졌다. 나랑 할머니만 있는 조용한 병실, 가끔 의료진들이 드나드는 소리를 들으며 옆으로 구부러진 채로 아픔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의외였던 점은 외롭거나 무섭다거나 누가 곁에 있으면 좋겠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저 눈 앞에 닥친 고통의 물결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새벽 4-5시가 되자 진통 간격은 5분 이하로 떨어졌다. 이것은 출산의 진통이 확실하다고 느낄 때 쯤에는 의료진들이 돌아가며 나의 상태를 진단하고 있었다. 첫 내진에서 자궁문이 5센치가 열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생각보다 무척 빠르게 진행이 된 것!


이윽고 안경을 쓰고 착실해보이는 자그마한 여자 선생이 와서 나에게 청천벽력 Vol. 2 를 시전했다. 지금 제왕절개 수술을 하자는 권유였다. 다음날 수술실 일정들은 전부 미리 잡혀있기 때문에 정규 수술시간이 시작되면 자리가 없을 거라며 지금 당장 비어있을 때 수술을 진행해야한다는 것이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아이가 커서, 긴급수술이 어렵기 때문에, 나라에서 정한 방역방침이 그렇다고는 하지만 내 몸에 대한 선택권이 내게 없다니. 바보같이 코로나에 안 걸렸더라면, 유도분만일을 조금만 더 미리 잡았더라면 원하던 자연분만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더욱 마음이 아려왔다. 하지만 아는 것도, 의견도 별로 없는 초산모인 나는 의료진들의 말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래, 인생에 맘대로 안되는 것도 있지. 친구들도 많이 했는걸..!


"알겠어요. 제왕절개 하겠어요..!"


그렇게 비장한 승낙을 얻어낸 주치의는 동의서를 준비한다며 나갔다. 밖은 아마 아직도 새파란 새벽,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어 수술을 한다는 사실을 알렸고 엄마의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남편에게는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제왕절개를 하게 됐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그 뒤로는 연락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렇게 주치의를 기다리며 진통을 하고 있는데... 그런데... 동의서가 왜 안옴?


아무리 기다려도 동의서를 받으러 간다던 주치의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진통이 심해지자 억울해진 나는 '거 어차피 할거 빨리빨리 합시다'라는 심정으로 수술실이 잡혔는지 재차 물어봤다. 하지만 간호사들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는 상황 속 또 하나의 충격적 소식 Vol.3 이 들려왔다.


"죄송한데 수술실이 없어요.. 일단은 초산모신데 진행이 빠르셔서.. 자연분만으로 해보셔야겠어요."



7. 출장분만의 시작



뭐라고? 장난하나? 수술실이 없다고? (그리고 난 죽겠는데 이게 진행이 이게 빠른거라고?)


신이 도왔는지, 운명의 장난인지, 그렇게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다시 자연분만을 하게 된 것이다. 옆 자리의 할머니는 옆방으로 옮겨지고 많은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커다란 기기와 모니터링 장비들이 비닐에 싸인채로 도착했고 약 20명정도 되는 인원들이 나의 출산을 위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모든것이 격리병동의 산모 1인을 위한 세팅이었다. 병실에서 분만을 하게 되는 것이다. 


본래는 분만장으로 이동하는 게 정석인데 그때는 이게 특이한건지도 모르고 음 이제 낳을때 되니까 다들 준비를 하는군 정도로 생각했다. 나중에 들은 거지만 음압병동에서 출산한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당연히 그럴만도 하지.. 덕분에 기념(?)으로 분만 직후 병실의 전경과 아가 사진도 찍어서 보내주셨다.


진통을 기록하는 어플의 마지막 기록은 5:29:49 였다. 그때부터는 핸드폰은 곱게 던져놓고 고통뒤에 이어지는 고통의 물결을 맛보았다. 피할 수 없는 아픔이 한바탕 내 몸을 힘껏 비틀고 가면 무서운 얼굴을 한 다음의 진통이 또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는 간호사선생님들에게 '제발 멈춰주세요' 라고 빌었다. 무통주사를 요청했다가 마취과에서 격리병동까지 오는 것이 어렵다는 얘기를듣고 나는 또 한번 사정사정을 했고 (이때는 '사람 살리는셈 치고 제발 부탁드려요' 라고 말했다. 이런 드라마틱한 진상이 또 있을까?) 6시반에 너무나 간절히 기다리던 에피듀럴이 도착했다. 주사를 꽂는데만도 15분이 넘게 걸렸지만 마음은 안정됐고 고통이 가시자마자 나는 까무룩 잠에 들었다. 그리고 눈을 뜨니 8시가 다 됐다.


간호사 선생님이 날 깨우더니 이제는 힘주기 연습을 하자고 한다. 주말 아침에 곤히 잠들어 있는 나를 깨워 갑자기 등산을 가자는 아빠같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나는 어른이니까 어려운 일도 해야한다.


관장을 하고 진통이 올때마다 힘을 주는 연습을 시작했지만 너무나 아팠다. 힘주면 오히려 덜 아프다고들 하는데 나에게는 또 다른 색깔의 고통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한가지 신기한건 그렇게 아픈데도 나도 모르게 자꾸 힘을 주게 되는 것이었다. 마치 그렇게 힘을 주는 게 자연스러운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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