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놀랐다. 전날 밤, 보호자가 함께 입원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는 그대로 집에 가서 씻고 일하다 잠들었을 것이다(그는 절반정도는 미국 시간에 맞춰 일을 한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강아지와 모닝산책을 하기 위해 맥도날드로 향하려던 찰나 아파트 단지 안에서 "애기 곧 나올것같아요!" 라는 내용의 전화를 받았다고. 순식간에 그는 12킬로짜리 강아지를 번쩍 들고바로 다시 집으로 달려가 발도 닦이지 못하고 지갑만 챙겨 차를 타고 병원까지 달려온 것이다. 기록적인 속도로 병원에 도착한 그는 이미 5분전에 애가 나왔다는 놀랍고도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그동안 나는 같은 자리에 누워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다. 아기는 신생아병동으로 옮겨지고 어느새 내 주변의 병상은 모든것이 그대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기분좋은 문의가 있었으니. 바로 밥을 먹을 때가 됐으니 죽과 밥중에 고르시라는 것. 거의 국적기를 탔을때 상냥한 승무원님의 기내식 메뉴를 어떤걸 드시겠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에 필적하는 두근거림이었다. 나는 왠지 출산했다는 기분을 내고싶어서 죽을 골랐다. (매번 선택하는 건 줄 알았는데 그 뒤로 계속 죽이 나왔다. 나쁘진 않았지만 한번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배움을 또 한번 얻게되는 서울대병원..) 격리자를 위해 일회용 플라스틱 용기에 배달된 점심은 맛있는 수준이라고 보긴 힘들었지만 지쳤던 나는 달게 먹었다.
밥을 먹고 있는 중에 감사하게도 남편이 와서 잠깐 인사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방호복으로 싸매고 페이스쉴드를 끼고 들어온 남편. 어찌나 반갑던지. 혼자서 출산한 나에게 경의를 표한 남편은 내가 격리기간동안 먹을 간식거리들을 전해주고 아기에게 필요한 물건들도 사서 전달을 했다. 한편 확진 판정을 받은 내게 주어진 일주일 격리는 꼭 병원에서 할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나는 더 이상의 입원이 필요 없는 너무나 건강한 환자인지라 만 사흘째 되는 날 퇴원하기로 결정했다.
마지막 이틀동안 4인실은 꽉 찼다. 나는 갇혀있었음에도 큰 일을 해냈다는 성취감에 은은하게 즐거운 느낌으로 지낼수 있었는데, 옆 병동에 있는 아기의 소식도 듣고, 하나뿐인 화장실에서 수동식 좌욕, 간이 샤워실에서 머리감기 등 보통이 아닌 일들을 하며 산모용 죽식을 먹었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후각이 마비돼 음식맛은 별로 느낄 수 없었다.
퇴원 후에는 조리원을 갈 수도 없고, 집에서는 내가 아기를 만날수도 없는 확진자 산모인지라 아기는 병원에서 며칠 더 시간을 보내야 했다. 격리수칙을 지키기 위해선 아이를 입원시킬 수밖에 없었는데, 병원비는 병원비대로 내야했으니, 코로나 방역대책 이대로 좋은가?
이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다 상관없다. 다 좋다. 나도 너도 건강하게 병원에서 나왔으니 다 되었고 감사하다. 이렇게 코로나 확진 산모의 만 9시간여의 출산일기는 끝이났다. 병원에서의 기억도, 조리원에서의 기억도 호돌이 덕분인지 화사하고 따뜻한 느낌으로 남아있다. 밤늦게까지 행정처리를 해준 보건소 공무원분, 고통스럽고 외로웠던 시간동안 내 손을 잡아줬던 간호사 선생님들, 낯선 곳에서 반가운 얼굴이었던 의사 선생님, 남편에게서 받아본 그날 만개한 병원 교정의 벚꽃, 플라스틱 수저로 퍼먹던 미역국의 따뜻한 감촉을 잊지 못할 것이다.
아기는 3.7kg의 튼튼한 몸으로 태어나 거침없이 성장하고 있다.
또 다른 사랑을 내게 가르쳐 준 존재. 더 좋은 사람이 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