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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욕월매 May 15. 2023

이태원 해밀턴 수영장에 가는 이유

2013년. 대학을 휴학하고 결정되지 않은 미래를 앞둔 채 이런 저런 인턴과 계약직으로 시간을 보내던 시절이었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나는 처음으로 마음을 먹고 비키니 수영복을 샀다. 그 전까지는 남에게 내 몸이 보여지는게 부끄럽고, 뭔가 준비된 모습으로 나서야한다는 생각이있었는데, 프랑스에 교환학생을 몇달 다녀왔더니 눈에 뵈는게 없어진 상태가 돼 버린 것이다. 마음만은 유러피안 감성이 충만한 (명예)불란서인.


그리고 나는 이태원에 위치한 해밀턴 호텔 수영장에 갔다. 입장료는 만삼천원, 락커는 별도. 친구도 한명 불렀다.


그곳에서 맛본 자유!

물속을 가르며, 물 위를 유영하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진정 자유로움을 느꼈다.


어릴적부터 수영을 좋아하던 나는 줄곧 시원한 물 속에서 물장구를 치고 싶었다. 하지만 어른이 돼가지고 수영을 한다치면 실내 수영장에서 모자와 물안경을 쓰고 레인을 달리는 옵션 뿐이었다. 나는 그런준비물이 필요가 없는, 직선으로 달릴 필요가 없는 너른 야외수영장이 좋았다. 하지만 서울 시내에서 그런 장소는 어딜 가든 가족단위 손님들과 귀여운 아기들로 붐비는 곳들 뿐.


그런 점에서 해밀턴 호텔 수영장은 비교적 손님도 적고, 도심속에서 하늘이 보이는 수영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게다가 한강시민수영장과는 다른 점, 바로 술이 있다는 점이 킬러 포인트다. 점심때가 다가오면 어딘지 고소한 냄새가 스멀스멀 풍겨온다. 따라가보면 지글지글 구워지고 있는 버거패티. 브리오쉬 번에 노릇한 패티와 치즈를 얹어 양상추와 토마토를 끼운 별다를것 없는 햄버거지만 수영 후의 허기를 달래는 따뜻한 감칠맛과 기름진 감자튀김에 맥주 한잔이면 이번달 행복지수는 이걸로 다했다고 봐도 좋다.


그 뒤로도 수영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불러서 곧잘 놀았는데 다들 순수하게 수영장과 술을 좋아했다. 매번 태닝오일을 들고와 여름이 끝날 즘이면 새까매친 친구도 있었고, 근육맨 친구도 있었고, 위스키를 몰래 챙겨와 맥주에 타주던 친구도 있었다. 한편, 해밀턴 수영장에 간다고 하면 뭔가 멋진 몸매를 가진 사람들이 근육을 과시하거나 이성을 꼬시러 가는 곳이라고 보통 생각한다. 별 생각 없이 간다 해도, 사실 처음엔 나도 그렇게 느꼈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해밀턴이든, 반얀트리든, 이비자 섬이든, 마이애미 비치든, 막상 그런 곳에 가면 옷 입음과 벌거벗음 중 후자에 가까운 사람들이 주루룩 앉아있으니 그정도 상황이 되면 섹시하다는 생각보다는 목욕탕에 온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인간, 인류, 남성과 여성, 여성과 남성의 가슴모양이 다르군, 뱃살이 저정도도 없으면 사람이냐 정도. 새삼 인간이란 이런것이구나. 건강한 신체 평범하게 멀쩡한 기능을 하는 사지와 오장육부에 감사해진다.


물론 그런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모이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것은 저녁에 있는 Party(영어로 한번 써 봄)나 클럽 행사 등이 있을때 정도고, 낮시간동안에는 자주 오는 레귤러 멤버들이 유유히 태닝을 하거나 여유있게 물장구를 치고 있는 오픈 스페이스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그곳에선 외모보다 중요한 것이 있으니, 바로 가장 멋진 튜브를 가진 사람이 짱이 되고, 술을 나눠주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는 법칙이다. 다시 말해 튜브를 구입할 수 있는 재력과 술을 나눌 줄 아는 관대한 인성이 좌중을 압도하는 중요한 덕목인 셈이다.


살면서도 마찬가지. 소개팅시장에 나온 30대 초반 남성이 아닌 이상, 살면서 만나는 타인의 외모는 생각보다 중요치 않다. 오히려 자신있는 모습과 은은한 미소, 건강한 생활습관이 느껴지는 안색과 말끔한 차림새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한편 상대방이 돈이 많다? 술을 나눠준다? 이건 분명히 놓칠 수 없는 인생의 귀인일 가능성이 다분하다.


어느 비오던 날의 해밀턴. 수중 수영의 묘미를 아는 수영장


고로 임신하고 출산을 하고 아기를 열심히 키우고 있는 지금도, 난 해밀턴에 가고 싶다. 도심속 수영장 중, 이렇게 저렴하고 (마지막에 갔을 땐 3만원정도 하지 않았나 싶다) 붐비지도 않고 비가 와도 열어주는 맘씨 좋은 운동장이 또 있을까? 생각보다 가볍지 않은 철학이 있는 인생의 축소판. 그와 동시에 한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한여름의 바람과 태양. 가까운 이태원에서 느낄수 있다.






(광고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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