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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방랑자

길에서 마주치는 그 사람

‘오늘은 안색이 유난히 창백하네.‘


습관처럼 그를 힐끔거린다. 집 앞 전철역 사거리, 신호가 교차하는 그곳에서 그를 찾는 일은 어느덧 나의 묵시적인 일과가 되었다. 그는 마치 도시의 풍경 속에 부주의하게 그려진 한 점의 스케치 같았다. 빗질을 잊은 듯 헝클어지고 엉킨 머리칼과 세월의 얼룩이 묻은 붉은 패딩 차림의 그 남자는 도시의 무채색 속에서 강렬하게 나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등에 멘 커다랗고 낡은 백팩은 마치 그가 짊어진 지나온 세월의 무게처럼 보였고, 가까이 스칠 때마다 풍겨 나오던 진한 술 냄새는 삶의 고독한 냄새처럼 짙었다.


그는 사거리의 질서, 즉 신호등의 녹색과 붉은색이라는 명확한 규칙 속에서만 움직였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다시 저쪽에서 이쪽으로. 세상의 모든 무질서와는 달리, 그의 발걸음은 철저히 질서 정연하여 차라리 안쓰러울 정도였다. 때로는 안경점 유리창 앞에서 비스듬히 앉아 넋을 놓기도 하고, 은행 계단에 잠시 기댔다가 경비원의 손짓에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띠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볼 때마다 그의 얼굴은 점점 초췌해져 갔다, 눈빛은 더욱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헤매는 것 같이 보였다. 그 속에는 젊은 날의 푸른 꿈, 깨어진 약속, 그리고 차마 말로 표현하지 못한 후회의 순간들이 돌처럼 침전되어 있을 것만 같았다, 며칠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면 불길한 예감이 들다가도, 다시 사거리에 서 있는 그를 발견하면 내심 '무사하구나' 하는 반가움이 일기도 했다.


도대체 어떤 사연이 그를 이 역 사거리에 묶어 두었을까, 이 동네 어딘가에서 헤어진 가족이나 연인을 그리워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채 영원히 맴도는 고독한 순례자인가.


어느 날부터인가, 그가 보이지 않았다. 사거리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로 붐볐지만, 붉은 패딩을 입은 그 남자의 흔적만은 깨끗이 지워져 있었다. 문득 궁금함과 함께 설명할 수 없는 안쓰러움과 공허함이 밀려왔다. 그는 더 따뜻하고 살기 좋은 곳으로 떠난 걸까, 아니면 우리 모두가 언젠가 걸어가야 할 그 먼 길로 향한 걸까.


차가운 겨울이 지나가고, 어느새 봄의 기운이 세상을 부드럽게 감싼다. 거리는 다시 새 생명의 숨결로 가득하고, 햇살은 순은처럼 맑고 따스하게 빛난다. 바람이 살짝 스칠 때마다 내 마음도 고요한 물결처럼 잔잔히 흔들리다가 이내 가라앉는다.



사거리의 교차점에 서 있다. 그가 늘 머물던 그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붉은 패딩 차림의 그 사람, 이름도 사연도 알 수 없던 그 모습이 문득 마음의 사거리에서 신호처럼 깜박인다. 지금은 어디쯤에서, 조금은 편안히 머물고 있을까.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또 어디로 가는 걸까. ‘지금, 여기’ 잠시 머무는 이 삶이란 결국 끝없는 건너옴과 떠남의 반복인지도 모른다. 안락한 집으로부터, 익숙한 일터로부터,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그렇게 크고 작은 이별과 귀환을 거듭하며 살아간다.


초록불이 켜지자, 잠시 멈춰 있던 사람들의 발끝이 일제히 움직인다. 봄의 찬 바람이 내 볼을 스치며 지나간다.

'잘 가요. 이제는 편안한가요.'

그의 자리 앞에서 혼잣말처럼 속삭이고, 나도 천천히 길을 건넌다. 바람에 섞인 빛이 신호등 위에서 잔잔히 흔들린다. 마치 그가 여전히 이곳 어딘가에서 나를 향해 손을 들어 인사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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