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얀갓 Oct 02. 2022

연기를 취미로 선택해본 후기, 첫날

망원역 연극 공연반 액팅미




늦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환승역마다 전속력으로 달려서 지하철을 탔고 겨우 연습실 건물 앞에 도착했다. 연습실이 지하여서 그런지 너무 어두웠다. 문은 열린 건가? 머뭇거리다 내려가는데 계단 높이가 가파르다. 올 때마다 넘어져 구르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는걸, 하고 생각했다. 다행히 반 층 내려가고 보니 문이 활짝 열린 연습실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가지런히 놓인 신발들 사이에 구찌가 쓰인 운동화가 눈에 띄었다. 뭘까, 돈 좀 있는 분이 연기를 취미로 하시는 걸까? 어떤 사람들이 모여 있을지 호기심을 가지고 문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하고 나름대로 밝게 인사하고 앉을자리를 탐색했다. 안쪽 자리이면서 옆에는 하늘거리는 베이지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분이 앉아있는 위치! 저기가 좋겠다고 생각하자마자 그곳에 앉았다. 매끈하게 제본된 대본에는 ‘6기 공연, 올모스트 메인’이라고 적혀있었다. 바로 대본부터 읽는 걸까 궁금해하던 차에 3시 30분, 시작 시간이 되었다. 연출 선생님까지 모인 사람은 총 8명. 대본 리딩을 하기 전에 잠깐의 아이스브레이킹 시간을 가졌다. 거창한 것은 아니고 간단한 자기소개와 1:1 대화를 나눠보는 시간이었다.


자기소개를 듣는데 왜인지 긴장해서 사람들 이름이 머리에 하나도 남질 않았다. 속으로 내가  말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중할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드디어  차례다. 연기가 처음이다. 초보여도 공연을   있냐고 문의하려다 말았는데  이유는 하다가  안되면 환불해 주시겠지 하는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라는 쓸데없는 사족을 달며 자기소개를 마쳤다. 그래도  웃어주는 사람들이라 다행이었다. 그래,  만나면 초반에는 다들  말에  웃어준다. 살아남기 위한 인싸력! 친해지고 나면 나중에는 쭈구리가 되지만. 아무튼, 도대체 어딜 보고 말해야 하는지   없는 마음에 대충 눈알을 굴렸는지 그때의 기억, 이미지가 흐릿하다. 역시 많은 사람 앞에서 이야기하는  어렵다. 연극하면서 이런 발표 울렁증도  고쳐졌으면.


분위기를 보니 대부분 서로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새로 온 멤버는 나와 어떤 여자분 둘 뿐. (분명히 헤어질 즈음엔 이름을 외우고 있었는데 지금은 다시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없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지난 공연에서 함께 합을 맞춰본 경험이 있었다. 다행히 1:1 대화 시간에 이야기하면서 기존 멤버 두 명과 친밀감을 높였고 어렵지 않게 그곳에 녹아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 옆에 있던 베이지색 원피스의 여자분은 나보다 두 살 어리고, 지난 연극 공연 때 사진을 보여주면서 어떤 배역을 했는지와 무대를 꾸미고 음향도 자신이 도맡아 했다는 걸 말해줬다. 또, 공연 전에 프로필 사진을 찍으려고 살을 6킬로나 뺐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다이어트까지 시켜주는 훌륭한 취미활동! 잘 선택한 듯싶었다. 나도 다이어트를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외엔 기억나는 게 별로 없다. 갈색 눈이 예쁘고 투명한 피부에,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하지만 잘 웃는 사람이구나 하는 정도만 떠오른다. 목소리도 되게 귀여웠는데. 어쨌든 귀여운 사람. 하하.


 번째 대화 상대는 자신을 대학생이라고 소개한 어떤 남자다. , 내가  살이나 많네! 하면서 소개를 들어서인지 나이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이름을 물었다. 재우라고 했다. 이재우. 초성으로만 쓰면 ㅇㅈㅇ네 이름 귀엽다 하고 잡생각을 하면서 대화를 했더니  머릿속에 남아있는 정보가 별로 없다. , 전공을 한번 바꿨고 대학 축제 기간인데 지금 다니는 학교에선 올해 축제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불쌍한(?) 생각이 들었지만 정작 본인은 별로 아쉬워하는  같지 않았다지난 공연  공연 2 전까지 대본이  외워져서 급하게 외웠다는 말도 했다.  뒤론 시간이 갈수록  말이 없어서 어색하게 웃기만 하다가 끝이 났다.


모임의 기본 규칙(지각비, 태도 등)을 듣고 드디어 대본 리딩 시간. 옴니버스 형식의 대본이라 주연 같은 등장인물이 꽤 많았다. 공연에 참여하는 누구나가 어느 정도 비중이 있는 배역을 맡아 연기하게 될 터였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있고, 중간에 네 개의 에피소드가 있는 형식이었다. 미국인이 쓴 극본이라 등장인물도 모두 미국 이름에 대사도 리액션이 컸다. 오! 아! 오우! 고마워! 이런 대사가 굉장히 많이 보였다. 미국식 농담도 섞여있는 것 같고, 대본 자체에 쓰인 비유도 영어여서 잘 전달할 수 있을까 싶은 부분도 있었다. 선생님은 연기로 커버가 가능하다고 말씀하셨지만. 두고 보면 알겠지. 초보여서 그런가 그게 가능한지 어떤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마음만 들었다. 하하.


나는  가지 배역을 맡아 읽었는데 하나는 동성애와 관련된 배역이었고 하나는 헤어진 애인을 우연히 식당에서 마주치는 역할이었다. 대본에 지문이 쓰여있기는 했지만 상황 설명이 부족한 상태로 인물의 감정을 유추하면서 대사를 읽으려니 국어책 읽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그나마 다행인  상대 배우가 있으니 상대의 감정을 통해 대충 이런 상황이겠구나 하는  짐작하며 받아칠  있다는 점이었다. 어쨌거나 다음 장면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적혀있는 대사만 보고 바로 읽어내는 , 발치에 무엇이 걸릴지 모르는 상태에서 하늘만 보고 장애물 달리기를 하는 거랑 비슷했다.


설상가상으로 대본 리딩 시간이 길어질수록 집중력이 흐려졌다.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자라. 눈에서 글자가 떠다니고 집중이 안됐다. 상대방이 대사를 읽어도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어찌어찌  대사는  읽어냈다. 끝나고 정신을 차려보니 겨에 땀이 흥건할 정도로 긴장해 있었다. 그럼에도 재미있고 벅차서 다음 연습이 기다려지기는 했다.


각각의 에피소드마다 생각할 거리가 있어서 이야기 하나가 끝날 때마다 어딘가를 곱씹게 되는 면이 있었다. 감정이 약간씩 가라앉는듯한 기분도 들었고 멍해지기도 했다. 도대체  인물은  저런 대사를 했을까.  저런 행동을 하지?  상황에 제일 부합하는 인물은 누구고 내가 되어보고 싶은 인물은 누굴까? 떠오르는 질문에 대답하면서 마음속으로 장면을 그려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이 읽는 대사에 나라면 어떻게 읽었을까 상상해보며 속으로 따라 읽기도 했다. 그렇게 1시간 정도 대본을 읽은  같은데  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졌다. 무언가를 하고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좋은 신호다. 내가  빠져 있었다는 증거였으니까.


네 명씩 모여 앉아서 던킨도너츠를 먹었다. 사실 먹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마스크를 벗고, 표정을 관찰하면서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또 다른 기회였을 뿐. 다행히 언니(라고 생각하는데 나이가 잘 기억나지 않는)가 대화가 끊어지지 않도록 잘 이끌어줬다. 진행본능이 있는 사람이 한 테이블에 앉아 있으니 마음이 편했다. 화장실을 다녀오느라 내가 좀 늦게 자리에 앉았는데 주스도 따라주시고 도넛이 멀다며 내 쪽으로 그릇을 옮겨주기도 했다. ‘친절한 분’이라고 말했더니 원래 자기 성격이 그렇다고 했다. 그래서 가끔은 이성에게 오해를 사는 일도 있었다고 하는데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저는 오해 안 해요! 그런 쪽 아니에요.’하고 둘러댔다. 농담 반 진담 반. 다행히 착한 재우랑 다른 남자분(아마도 나랑 동갑인)이 웃어주셔서 잘 넘어갔다.


 오른쪽에 앉아있던 동갑? 남자분의  팔에는 문신이  개나 그려져 있었다. 가늘가늘한 팔에 문신을  개나 새기다니, 아프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역시. 갈수록 고통이 심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새겨진 문신은 기도문,  안에 그려진 나무, 그리고 피에로를 연상시키는 그네  사람 그림이었다. 의미를 물으려 했더니 긴 이야기가 될지도 몰라서 나중에 알려준단다. 나는 괜히 심술이 나서 ‘다음에는 아무도  의미 다시  물어볼지도 모른다.’라고 했지만 , 괜찮았다. 그럴  있지. 그랬는데 취미를 소개하면서    튕긴다. 사진이 취미라길래 사진 찍은   보여달라고 했더니 보여줄 것처럼 한참을 찾아보고서   된단다. 신비주의인 건가? 보여줄    밀당의 고수인 건가? 고전소설 읽기를 좋아하고 철학책도 가끔 읽으신다는  남자분도, 캐릭터가 확고하다.


마지막으로 재, 아까 일대일 대화하면서 어색하게 대화를 끝마친 상대였는데 이번에는 의외로  웃음 버튼 역할을 했다. 진행본능 언니가 대본 외우는  힘들지 않냐고 물었는데 아까 나한테  말이랑 다른 대답을 하는 거다. 나한테는 2 전까지  외웠다고 해놓고 이번에는 ‘저절로  외워지게 되어있다.’라고 하는 거다. 아니  아까랑 답변이 달라? 그랬더니 자기딴엔 배려해서 그런 거란다. 배려심이  거였구나. 그런데  말을 하는 진우 표정이 웃겼는지 말투가 웃겼는지 내가 웃음이 터져버렸다. 참으려고 했는데 계속 너무 웃겨서 나중에는 바닥에 앉아서 눈물까지 흘리며 웃었다. 반대편 테이블에서 무슨 일이냐며 물었다. 심지어 우리 테이블로 찾아왔다. 같이 웃자는데그들을 공감시킬 자신은 없었다. 그냥 각자 확고한 캐릭터를 가진 사람들이 하는 대화가 무슨 만담을 보는 것처럼 웃겼을 뿐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저 어색함을 이기지 못하고 웃기 시작했을 뿐인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색한  참다못해 웃기 시작했는데 멈출 타이밍을 놓친 거였지. 그래서 웃다 보니 눈물까지 나게 웃어버린 거고. 그렇게까지 웃은    만인데 내가  그랬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저, 후련하다.


간단한 다과회 후에는 연기 연습이 있었다. 둘씩 짝지어 상대방 관찰하기. 추론이 아닌 보이는 사실만 5가지 말해보기. 그리고 다음으로는  가지 문장을 말하고 계속해서 상대방 따라 하기. 상대방의 어조를 따라 하는  포인트다. 어차피 상대를 완전히 똑같이 따라 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상대의 말투를 비슷하게 소화해서 표현하다 보면 미묘한 변화가 더해져 가는 점이 연습의 묘미였다. 그다음 단계로는 상대의 감정에만 집중해서 반응하는 연습을 했다. 대사는 중요하지 않았고 같은 문장을 서로 주고받으며 감정만 교감하는 거였다. 목소리가 성우 같은 남자분이랑도 해보고 베이지색 원피스의 귀여운 여자분이랑도 잠시 해보고, 재우랑도 해보고 선생님과도 연습해봤다. 솔직히 룰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헤맨 시간도 있었고 규칙은 이해했는데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헤매기도 했다.


성우 같은 목소리를 가진 분은 도중에 베이지색 원피스의 여자분한테 나를 맡기고 어디론가 가버리셔서 솔직히 조금 서운했다. , 내가  못해서 답답했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덕분에 베이지색 원피스의 여자분이랑 짧지만 알차게 시간을 썼는데, 말할수록 띄어쓰기가  되는 느낌이어서 그게 이상하게 리듬감이 느껴지고 재미있었다. 진우랑은 그새 편해졌는지 하다가 너무 웃겨서  번이나 멈췄다.( 웃음 버튼으로 임명합니다.) 마지막 선생님이랑  때는 진짜 어떻게 해야 하지??? 물음표가 계속 떠다니는 느낌이었지만 그냥 했다. 분명히 말하고 있는 내용은 ‘ 바지 올렸어라든가 ‘ 깍지꼈어이런 문장이었는데 그걸로 주고받으며 따지듯이 말한다든지 칭얼댄다든지 하는  되게 생소한 경험이었다. 상대의 표정과 목소리 톤을 듣고 감정을 캐치하는  일단 쉬운 일이 아닌데 거기에다 내가 알맞은 반응까지 해내야 한다는  생각보다 정말 쉽지가 않았다.


연습 시간이 끝나는  순식간이었다. 그냥 나오기가 아쉬워서 괜히 도넛 담았던 그릇 설거지도 하고 그랬다. 다음 주가 있으니까 아쉬움을 달래면서 연습실을 나왔다. 친해진 진행본능 언니랑 이야기하면서 지하실 계단을 걸어 올라서 그런가, 처음 내려올 때만큼의 단차가 느껴지지 않았다. 가뿐하게 계단을 올라 지상으로 나오니 이미 해가  있었다. 일곱 시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짧아진 해를 아쉬워하며 다시 망원역으로 걸었다.  작은 건물마다 음식점이며 카페가 예쁜 조명을 밝히고 있었다. 다음에  때는 그냥 돌아가지 않을 거야, 다짐하게 만드는 거리였다. 다음  토요일에는 연습이 끝나면 망원동 카페 산책을 하고 돌아가야겠다.



*등장인물은 실명이 아닙니다.


작가의 이전글 싶어질 무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