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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콜과 구공탄 May 22. 2023

땡큐와 쏘리

사람, 공존, 그리고 소통 

 간만에 가족들과 함께 해변으로 왔다. 또한 간만에 비바람 없는 햇살 좋은 날씨를 맞아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가족들 각자가 시간을 보내던 중 나는 해변과 거리를 구분 짓는 벽돌 경계선(?) 위에 앉아 사람 구경을 하며 멍 때리고 있었다. 다양한 방식으로 볕을 즐기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여유와 만족감이 가득 차보였다. 그렇게 몇 분이나 흘렀을까? 한 사람에게 시선이 꽂힌다. 


"Would you like..."

"I've already. Thank you." 


 멀어서 잘 들리지 않았던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영어가 짧아서 모두 알아듣진 못 했다ㅎㅎ 허름한 청바지에 단추 세 개 정도를 풀어헤친 평범한 셔츠, 가슴 앞쪽으로 헐렁하게 매여져 거의 열어젖혀진 채로 관심 밖에 있는 듯한 작은 백팩의 주인인 백발의 백인 아저씨가 터벅터벅 걸어간다. 손에 든 스낵류의 볼품 없어 보이는 봉다리를 자신 있게 건네지도 못 하고, 그렇다고 자기 쪽으로 가지오지도 못 한 모습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있었다. 내 어린 시절에 피서를 가거나 명승지를 가면 꼭 만나게 되는 껌 파시는 할머니 같은 느낌이랄까? 나에게 권했더라도 사지는 않았을 것 같다. 어떤 스낵인지도 모르고, 얼마를 달라고 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지나가는 세 그룹의 무리에게 비슷하게 말했지만, 누구도 구입하는 이 없었다.


 그 아저씨는 강요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사달라는 간절함이 있지도 않았다. 과자 봉다리만 없었다면 그냥 지나가며 말 한 마디 건네는 정도로만 보일 뿐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그를 뚫릴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볕이 주는 온 몸의 나른함과 멍 때림 속에서도 그 순간의 눈빛은 묘하게 내 호기심이 자극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불안정한 걸음걸이와 어디 한 곳으 빵 뚫린 듯한 눈빛. 보통은 그런 사람들이 건네는 그 무엇에도, 그것이 말이든, 물건이든 사람들은 받아주지 않는다. 아마 그들이 품고 있는 불안과 불안정감이 전염될 것 같은 무의식적인 기피 반응일까? 그가 건네는 스낵을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지만, 상대방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땡큐!"


 문득 궁금해진다.


'왜 쏘리가 아니고 땡큐지?"


 이럴 때 한국사람 티가 팍팍 난다. 아마 나였더라면, 미안해 했을 것 같다. 필요 없는 물건이니 사지 않는 건 당연한 거지만, 사달라고 한 아저씨에게 거절을 되돌려 준 것이니 아마 나는 미안하다는 말로 끝을 맺었을 것 같다는 논리다. 하지만, (한국 사람 입장에서 본 이곳 사람들인) 외국인들은 달랐다. 어쩌면 나와 비슷한 이유였으나 끝을 다르게 표현한 것일지도 모른다. 거절은 하지만, 내게 제안을 해준 것에 대한 고맙다는 표현, 뭐 이런 정도의 이유? 아니면, 그냥 습관성 땡큐일 수도 있고. 


 꼭 한국인이라 그렇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외국에 나와 사는 입장에서 볼 때 그 외의 이유를 딱히 찾기도 어려운 것이 내 생이다. 이곳의 외국인들은 의외로 사과를 잘 하지 않는다. 땡큐는 수도 없이 날리지만, 진작에 쏘리를 해야하는 상황에서도 잡다한 설명이나 이런 저런 얘기를 늘어놓을 뿐, (적어도 내게는 핵심인) 사과는 날리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백인 아저씨에게 거절의 끝을 땡큐로 한 그들의 마음이 궁금해졌다. 


'왜 땡큐라고 했을까?' 


이런 내 속을 알리 없는 그들이 내 생각을 듣는다면, 그들도 의아해 할 것 같긴 하다.


"왜 미안하다고 해야하죠? 내가 잘 못 한 게 없는데?" 


 자문자답하다보니 만일 그들이 이렇게 되묻는다면, 그 또한 전혀 이상할 게 없는 답이긴 하다. 피해를 준 것도 아니고, 필요하거나 마음에 드는 물건이 아니라서 거절한 것인데 쏘리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 


 간극이 큰 두 단어인데도 불구하고, 땡큐와 쏘리, 고맙습니다와 미안합니다는 희한하게 닮은 점이 있다. 백인 아저씨의 얘기에서처럼, 미안해 할 만한 상황인데, 고맙다고 끝을 맺을 때가 있다. 반대로, 고맙다고 할만 한 상황인데, 미안하다는 말로 건네줄 때도 있다. 이곳에서 6년 살면서 렌트비를 내기 어려웠던 적이 몇 번 있었다. 한국의 부모님에게도 더 이상 손을 벌리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가깝게 지내던 분에게 어렵게 입을 열어 500불만 빌려줄 수 있냐고 했을 때, 그분은 기꺼이 빌려주셨고, 언제든지 힘들면 말하라고 하셨다. 그때 나는 이렇게 얘기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해요."  


 나는 뭐가 죄송했을까? 40대 중반이 되도록 집값 하나 제 때 내지 못 한다는 의미의 자조적인 죄송함이었을까? 아니면, 그분들도 돈 쓸 곳이 많을텐데 나에게 그 돈을 빌려 주게 만든 점이 죄송했을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원치 않는 일들도 할 수 밖에 없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어른으로 사는게 참 어렵구나 싶을 때가 많다. 하고 싶은 일만 할 수도 없고, 해야만 하는 일에 파묻히는 것도 싫고. 그 중간에서 균형을 잘 잡고 살아야 하니 얼마나 어려울까. 이런 균형이 가장 필수적인 영역이 감사와 사과가 아닐까 생각된다. 비록 개인이나 나라나 문화 등에 따라 서로가 감사와 사과의 영역이 엇갈리는 경우는 있을지라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믿는 바이다. 그 아저씨에게 과자를 사주지 못 해서 미안해 하든, 필요는 없지만 제안을 해줘서 고맙다고 하든, 감사하고, 사과하는 태도는 분명히 필요하다. 어쩌면 삶의 필수 기술일지 모른다. 


 점점 감사하는 사람 찾기가 힘들어진다. 점점 사과하는 사람 보기가 어려워진다. 감사할 일은 없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일만 가득하다고 느끼는 우리들. 무조건 나는 아무 것도 잘못한 것이 없다는 식의 어긋난 자기애에 빠진 우리들.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많은 이들이 감사와 사과를 잃어버리면서, 삶을 살아갈 방법도 잊어버리는 것 같다. 그런 혼란스러움이 계속 되니 감사가 아닌 불평이 자연스럽고, 정당화 되는 것 아닐까? 그런 혼란스러움이 계속 되니 미안해야 할 마음은 온데 간데 없고 자기 방어하기 바빠서 상대방에게 손가락질하기 급급한 것 아닐까? 


 조금 어렵더라도, 굳이 필요를 못 느끼더라도, 감사와 사과를 다시 해보는 우리가 되면 좋겠다. 각자의 이유로, 사회적인 조건 때문에, 백인 아저씨에게 쏘리도, 땡큐도 하지 않아 버리고 마는 사람 말고, 둘 중 뭐라도 하나 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사회학이나 심리학 같은데서 말하는 감사와 사과의 이유 같은 건 복잡해서 잘 모르겠다. 내게는 그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매력적인 사람이고,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이 멋있는 사람이다. 매력적이고, 멋진 사람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사는 곳도 더 매력적이고, 더 멋져지지 않을까? 나만의 착각인가?^^;; 


 어쨌거나 그가 가방에 갖고 있던 스낵들을 다 팔았을까 라는 궁금증 끝에, 안타깝지만 그냥 그 길로 그 가방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을 것 같은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Sorry, Sir. And Thank you." 


20230514 14:34 ~20230522 19:57


*사진: UnsplashMatt Jo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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