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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끔비 Aug 31. 2023

조용히 살다가 의기양양하게 죽는다는 것

: 완벽히 의미 없고 가치 있는 상상이 만개하는 즐거운 계절에

꽃들은 조용히 꽃잎을 떨구어야 할 시간

우리는 모두 일 년에 한 번씩은 실컷 울어버려야 한다 ❞

장마/최옥     


너무 큰 구름을 피하고자 했던,

따뜻한 물로 손을 씻을 때마다 너의 생각이 나던,

눈이 멀어버릴 듯 햇살이 강해 내 안의 검은 마음들을 미처 보지 못했던,

한없이 고되고 한없이 외로웠던 모든 ‘우리’에게 까맣게 타버릴 듯 강한 햇살이 힘을 주었던,

아이들은 재잘재잘 오리들은 꽥꽥 선생님이 제일 좋아? 당근당근을 외치는 출판단지의 작고 여린 마음들이 한없이 예뻐졌던 여름이 지나간다.    

  

여름이 지나가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여름이 지나고 코끝을 간질이는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8월의 끝 그리고 다시 9월의 시작이다.     


나에게 이번 9월, 가을의 시작은 꽤나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다시 시작해 보는 학업과, 꽉 채운 입사 2년을 넘어 3년 차로 달려가는 첫걸음이자 무엇이든지 될 것만 같은 완벽히 의미 없고 가치 있는 상상이 만개하는 즐거운 계절.     


이 즐거운 계절엔 문득, 나는 여전히 누군가의 포근하고 안락한 품을 원하기도 하고 냉정할 정도로 독립적인 내가 무섭기도 하다.

어릴 땐 이런 내가 가끔 혼란스럽기도 했는데 이제는 이런 나를 굳이 숨기고 애써 웃지는 않는다. 하나부터 열까지, 완벽하게 모든 걸 잘 해내고 싶다는 마음의 가치는 많은 사람에게 가닿을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인 듯하다. 내 곁에 좋은 사람들 덕분에 늘 단단하게 행동할 수 있어 언제나 눈물겹게 고맙기도 하다.      


          


4월 16일 / 김민정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문학동네)     


네 생일인데 네가 없구나

그리움을 드리움이라 썼다가

유치해서 빡빡 지운다지만

네가 없구나 얘야.

네 생일인데 나만 있는 건 성가심이니 대략

아주 착한 나쁜 사람들이라 해두자

늙은 곡예사가 기괴하게 휘두른 채찍에

매일같이 맞던 아기 코끼리가 너라고 해두자    

 

어미 코끼리가 되어서도 잊지는 말자

지폐를 줍느라 구부린 곡예사의 척추를

보란 듯이 밟고 지나간대도 그건 너만의 재주니까

보무도 당당하게 당연한 일이라고 해두자

뼈가 내는 아작 소리를 아삭하게 묘사해야

고통에서 고통으로 고통이 전해질 수 있는 거니까      



살아가면서 찾으려는 삶의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다.

반대로 의미를 찾지 않아도 찾아지는 것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상처를 받고 싶지도, 주고 싶지도 않은 마음을 그대로 느끼며 온전히 ‘살아있음’을 경험하는 때가 그렇다.  

   

어딘가에 휘말려 상처를 받고 무엇인가에 엮여 절망스러울 때 나는 아기 코끼리가 된다.

기괴하게 휘두른 채찍에 맞아 죽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아주 정확하게, 한 번에 휘두른 두꺼운 채찍에 목숨이 끊어지는 편이 낫다. 그래서 그럴 때면 늘 발버둥 친다.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누군가의 미움이 두려워서,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가끔은 숨고 싶을 때가 있다. 그 상처를 딛고 꿋꿋하게 어미 코끼리가 되어가는 중이다. 그렇기에 어미 코끼리는 살아있음을 정확하게 안다. 온전히 살아있다는 감정이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한 것인지도 안다. 삶의 의미는 그런 데서 나도 모르게 찾게 되기도 한다.      




중요한 건 이 모든 것이 불쾌한 느낌을 준다는 점인데, 이는 우리 모두 삶으로부터 유리된 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너 나 할 것 없이 다 절뚝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나 많이 유리되었는지 진짜 '살아 있는 삶'에 대해서는 때때로 어떤 혐오감마저 느끼고, 또 이 때문에 누가 우리에게 이걸 상기시키면 도저히 참을 수 없어진다.

(...)

왜 우리는 이따금씩 옥신각신하는 걸까, 왜 변덕을 부리는 걸까, 대체 왜 뭘 요구하는 걸까? 우리 자신도 왜인지는 모른다. 어떻든 우리의 변덕스러운 요구를 들어준다면 우리는 오히려 더 나빠질 것이다. _도스토옙스키 『지하로부터의 수기』 中         



장강명 소설 『재수사』를 읽다가 도스토옙스키의 문장을 더 찾게 되었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학부 시절 배웠던 작품이기도 한데, 조용히 살다가 의기양양하게 죽을 수 있는 주인공을 아주 조금은 선망했을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다. 어미 코끼리가 되어가는 과정, 곡예사의 허리를 아작내고 그 아작- 소리를 아삭하게 표현하기 위한 과정의 일부가 즐겁다.      


그래서 코끝을 간지럽히는 시원한 바람이 부는 이 계절엔 재주를 더, 맘껏 부려보고 싶다.

아기 코끼리는 커봤자 여전히 아기 코끼리지만 언젠간 누군가를 품에 안고 이 경험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어미 코끼리로 불쑥 성장해 있을 테니 그때까지는 결코 기괴하게 휘두른 채찍에 맞아 죽지 않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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