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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안 Jul 22. 2021

감정에 이름을 바꿔 불러 본다면

엄마라는 미지의 세계

   이주 전 주말, 은진님은 제게 서로 서신을 주고받아 보지 않겠냐고 물으셨죠. 일정하게 글을 쓰는데 수신자가 있다면 조금 더 수월할 것 같다고, 이미 제안을 3번 거절당해서 익숙하니 부담 없이 단호하게 거절해도 괜찮다는 말을 덧붙여서요. 덧붙인 말이 너무나 나 같아서, 덥석 제안을 받았죠. 누군가에게 제안 또는 부탁을 가능한 하지 않지만, 하게 된다면 언제나 ‘쿨하게 거절하셔도 됩니다’라는 말로 상대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했던 제가 은진님에게서 보였어요.   


  간단히 형식을 정하고, 소개글을 작성하고 나서 이틀 만에 첫 서신을 보내셨죠. 어쩜 그렇게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시는지... 단숨에 재밌게 읽고서 좋다면서 답변을 쓰려고 하니 그제야 그 질문들이 너무 방대하구나 하고 은진 님의 계략에 스무스하게 속아 넘어간 저를 발견했습지요. 한마디로 은진님은 제가 어떻게 자라게 되었는지를 묻고 있었고, 저는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몰라 처음부터 제 스스로를 다 꺼내봐야 했어요.   


  첫 번째 질문, '엄마처럼 ' 하면 무슨 단어가 떠오르나요? 에 대한 대답은 '따뜻하게' 였어요. 처음 글을 읽으면서 직관적으로 튀어나온 단어다 보니 제가 '나의' 엄마에게 느끼는 감정일 수도 있고 일반적으로 제게 주입된 엄마의 이미지 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제 사고에 거리두기를 해야 했어요. 내게 엄마는 어떤 사람인지, 사실 저는 깊이 고민해본 적 없는 것 같아요. 그에 반해 은진님은  엄마에 대해 꽤 많은 생각을 해온 분이구나를 알 수 있었어요. 그리고 우리 엄마는 어떤 분이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은진님 편지에 대한 대답이 될 순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답신이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가더군요.   


  이 편지를 쓰기에 앞서 제가 가장 고민하고 조심스러웠던 것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엄마들을 비교하게 될까 봐, 그로 인해 가볍게라도 누군가가 박탈감을 느끼게 한다면 내가 원하는 의도가 아닌데, 그거였어요. 그 지점을 찾아서 고민을 오래 했죠. (어쩌면 이 글은 끝내 제 우려를 가득 품고 전달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그건 제 의도는 아니었다는 걸 미리 알아두셨으면 해요. )


https://brunch.co.kr/magazine/oejchunjaemom


  지난 열흘 동안 잠에서 깨면 은진님과 은진님의 어머니 생각으로 시작했던 것 같아요. 고유한 서사를 가진 두 분의 이야기가 더 궁금했고, 잘 알아야 제가 하는 말이 좀 더 은진님에게 가 닿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좀 더 은진님을 이해하기 위해 은진님의 브런치 매거진 ' 나는 엄마가 불편하다'를 정독했답니다.


  제가 느낀 은진님 글의 화두는 책임감과 죄책감이었어요. 엄마에 대한 책임감을 유독 무겁게 느끼고 나아가 부담스러워 도망가고 싶은 배경은 무엇 일지에 대한 고민이 이어졌어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고도 안되면 무력감에 빠지잖아요. 그동안 엄마와 함께 행복하고 싶어서 수많은 시도를 했을 은진님이 그려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던 감정들과 문제들을 자꾸 마주하고 , 때론 무력했을 아이가 그 글들 속에 웅크리고 있더군요.  




어떠한 자아상과 검열 기준을 가지고 있는가는 원래 타인의 것을 본뜨거나 교육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 이것은 외부 권위의 강제 규정이 내면화된 것인데, 부모, 스승, 종교 지도자, 같은 이상을 지향하는 단체나 기관 등에 의해서 제시된다. 내면의 권위는 일차적으로 내면화된 외부 권위를 토대로 시작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의존성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감정들을 그동안 변화된 자신만의 기준 안으로 끌어내 다시 평가하는 것이다. 검열은 느슨해지고 내면의 어두움은 조금씩 옅어진다. 이전에는 절대 안 될 것으로 여겨지던 두려움, 부모나 상사에 대한 분노와 울화, 인정과 박수에 대한 열망, 끓어오르는 감정과 한계를 넘는 경험을 겪어보고 싶은 갈망, 육체적 욕구가 허용된다. 이제 우리는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에 대한 스스로의 규율을 새로 만든다. 마치 삼투압에 의해 생긴 것처럼 타자로부터 물려받은 자아상의 윤곽을 파악하고 개관하며 검토하여 새로 하나하나 짜 나가는 것, 그리고 자아상의 차원에서 새로운 권위를 만들어가는 것이 관건이다.  [삶의 격] - 피터 비에리



서신을 쓰는 기간에 오래전 사두고 안 읽던 [삶의 격]을 무심코 읽다가 이 구절을 전하고 싶었어요. 어딘가에 기대고 싶은 엄마와 자아상이 강한 은진님이 만나서, 조금 힘겹게 은진님이 독립성과 자아상을 찾아가는 중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죠. 마지막 문장에서 처럼, 타자로부터 물려받은 자아상의 윤곽을 파악하고 검토하여 현재 은진님만의 새로운 내적 권위를 만들어 가는 중이구나. 이 과정을 조금 늦게, 조금 아프게 겪고 있구나. 이 과정의 끝엔 지금보다 더 단단해질 은진님의 모습도 그려졌어요.   



은진님이 보낸 첫 번째 서신에서 발췌


  글을 읽으면서 은진님이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 행간에 깊고 진득한 사랑이 느껴졌다면 오독일까요? 누구보다 은진님은 엄마를 많이 생각하고, 엄마의 행복을 비는 사람이란 사실을 깨달았어요. 오히려 이기적인 건 저예요. 저는 그저 제 살길 하나 잘 버티기 위해 고군분투하느라, "내가 잘 사는 것이 가장 큰 효도"라는 미명 아래 부모님을 생각하는 시간이 적어요.   



은진님 생각의 리듬을 따라가 보려고 여러 번 글을 읽으면서 , 마지막 과정만 제거하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새로운 음식을 먹거나, 좋은 곳에 가면 늘 경험하지 못했을 엄마를 떠올리고 죄책감이 들었어요. ->생각했어요.

*엄마는 행복하지 않은데 나만 행복해도 되는 걸까? -> 엄마도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죄책감이 들 때마다 그 마음에 이름을 규정하지 말고 '엄마 생각을 한다'라고 하는 건 어떨까요? 미안한 마음보다는 '생각하는 마음', 죄책감보다는 '이해하는 마음'으로 감정에 이름을 바꿔 붙여본다면  엄마를 생각하고 이해하는 모습으로 보이거든요. 누구보다 엄마를 사랑하는 딸의 모습이 앞선 서신 가득히 제게 질문을 던졌어요. 정작 은진님이 질문해야 할 상대는 엄마인 것 같은데 말이죠.   



엄마와 함께 찍은 사진을 찾아 올리고 싶었는데, 둘이서 찍은 사진이 없네요.


  첫 아이를 출산 후, 육아가 이렇게 힘든 거라는 걸 처음 깨닫고 그 광대한 벽에 대고 한숨을 쉴 때쯤 엄마에게 물은 적이 있어요.  

" 엄마는 그 작은 집에서 시부모님까지 모시고 애 둘을 어떻게 키웠대? 나는 애 하나만 낳고 시부모님 없어도 힘든데, 엄마 힘들었겠다."  


 전화로 했다가는 울컥해서 난데없이 신파극을 한편 찍겠다 싶어 문자로 보냈죠. 그랬더니 엄마에게서 돌아온 문자는


"그땐 너네 예쁜 맛에 힘든 줄도 몰랐지.


였어요. 그 말에 여린 몸으로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그 젊은 날의 엄마가 그려지더군요. 문자를 곱씹어 읽으며 혼자 몰래 눈물을 훔쳤어요. 그리고 힘들었겠다고 혼자 상상하고 엄마의 삶을 납작하게 만든 제 스스로가 부끄러웠죠. 엄마는 그 속에서도 기쁨을 맛보았을 테고, 분명 힘들었을 테지만 남겨 놓은 기억 중 가장 큰 그림은 '우리가 예뻤던 모습' 이란 사실에. 그리고 더는 엄마의 삶을 내 마음대로 규정하지 않겠다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내 마음대로 결론 내지 말고 물어야겠다고도 생각했고요.  


엄마의 주제는 대부분 자신이 아니라 자식이잖아요. 엄마에겐 엄마를 물어야만 해요. 그런데 은진님이 가진 호기심을 엄마에겐 좀 덜 쓴 것 같다는 생각을 말하지 않을 수 없네요.  


은진님 어머니의 삶에서 어머니를 가장 잘 이해해주는 분은 누구인가요?

.

  저는 은진님의 엄마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멋모르는 속 터지는 소리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창고 살롱(여성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이야기하는 것들 중엔 부족한 사회 시스템과 무의식적으로 강요받는 엄마의 이미지상에 대한 문제들이 있잖아요. 그런 관점에서 은진님 어머니를 생각해보았어요.   


 자주 부부싸움을 하고 시댁의 압력을 받는 80~90년대의 일반 여성의 삶, 지금 현재 내가 서 있는 상황보다 훨씬팍팍했을테고요. 세상 약자가 하소연할 데가 없이 울분에 가득 차서, 약자 중에 약자인 자식에게 화를 내는 모습. 그 모습은 참 슬퍼요.  


  그렇다고 해도 엄마라고 해서 모든 언행이 용인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서로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선을 넘어서면, 그리고 상대의 기질이 또한 더욱 감정적으로 민감하다면, 그건 생각보다 오랜 시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봐요. 그걸 알았다면, 세상 가장 약자에게 지금 당장 화를 내는 방법 외에 다른 해결책이 엄마에게 있었다면, 그 상황이 지속되지 않고 일시적으로 끝났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드네요. 큰딸이라는 작은 동아줄 말고 다른 줄을 찾아야 한다는 걸. 그건 해결이 아니라 도피라는 걸. 지금 잡아당기는 작은 동아줄이 오랫동안 어떤 당김의 압력을 품고 살게 될 줄 엄마가 미리 알았다면, 이 안타까운 관계는 멈출 수 있었을까요?


 은진님의 감정에 이름을 바꿔 부르고, 엄마에게 엄마를 물어봐주세요. 죄책감과 걱정이 억누를 때, 질문을 던지세요. 미지의 세계를 마주할 때 불안감은 더 높아지는 법이니까요. 엄마라는 미지의 세계를 여행할 용기를 내보세요.


저도 그만 이주 동안  차게 고민했던  서신을 '발행' 용기를 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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