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역행해서 이젠 아이를 출산하고 두 돌 전까지 처절하게 정신없던 나로 돌아가서 그때의 이야기를 전하기엔 나는 멀리 왔다. 둘째가 다섯 돌이 지났고 첫째가 이제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으니 좀 살만해진 영역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러니까 왜 엄마들이 이야기가 나오다가 쏙 들어가나, 왜 계속해서 진행되지 못했나 했더니 너무 힘들어서 누구라도 붙잡고 말하고 싶고 할 때는 글로도 말로도 지속적이고 오피셜하게 정리해서 말할 시간도 체력도 없다. 그 시기엔 한국에서 아이 키우기가 왜 힘든지 몸소 체험하며 그때 사회에 필요한 게 무엇이고 뭐가 문제인지 알게 되지만 피켓 들고 거리로 나가서 싸울 여력도 없다는 것이다. 거리로 나가기엔 딸린 아이가 시간마다 밥도 달라하고 기저귀도 갈아야 한다.
그러다 아이가 다섯 돌쯤 되면, 말도 잘하고 기저귀도 떼고 혼자서 호작호작 노는 시간도 늘어난다. 그냥 걸어가다가 이유 없이 넘어지거나 모서리에 드립다 눈 없는 사람처럼 박아대진 않는 시간이 오는 거다. 그때 돼도 사라지지 않는 선택의 연속이 기다리지만 몸은 좀 살만해진다. 살만해서 힘들었던 시기를 잊는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지금도 사회 구조적 문제는 눈에 띄지만, 일하면서 애 둘 키우느라 거리로 나가서 소리칠 시간이 없다고 또 변명 아닌 변명을 한다. 이래서 사회 변화가 더디지 뭐.
이래서 이야기가 지속되지 못했나. 너무 힘들 때 나온 이야기들은 너무 하소연 같아 스스로 내뱉기 꺼렸고 이젠 맷집이 생겨서 그때처럼 처절한 이야기가 더 이상 안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맘 껏 일하지 못했던 한을 이때부터 풀기 시작한다. 그러느라 엄마의 이야기를 구조적으로 꾸준히 하기 어렵다.
하지만, 앞서 기록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아무래도 관성이 있다 보니 조금이라도 바람을 불어넣으면 할 수 있다. 기록해 둔 힘이 있으니까. 그간 쌓아온 연대도 있으니까.
다음 스텝을 이야기해야 한다. 아이가 영유아인 시간이 지나고 나서 양육자가 다시금 제자리로 찾아가는 길에 대해. 속도가 느리더라도. 끝나지 않는 상황이 아니라, 끝이 있는 여정이고, 변화하는 길이고, 성장도 함께하며 계속해서 다음 스텝이 있는 여정이라는 것을.
얼마 전 연세대 교육학 구유정 박사님의 [ 여러 일을 병행하는 엄마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교육적 의미 탐구]논문에 인터뷰이로 참여했다. 그때 참여하면서, 일을 병행하는 엄마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영유아 시기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있는데 괜찮냐 물었다. 박사님은 우리는 그다음 스텝을 이야기할 필요도 있는 것 같다고 괜찮다고 답했던 것 같다. 그때 생각했다. 그래, 나는 그럼 나아가면서 계속 나의 이야기를 해야지. 그러면 미래를 그리기 막막한 현재를 보내며 아이와 함께 하는 엄마들에게, 흐릿한 그림이라도 보여줄 수 있겠지. 비록 모범 답안은 아닐지라도.
언제쯤 살만해지나요?
돌전후 아이를 낳은 부모를 만나면 그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 두 돌이 지나면 그래도 아이가 말이 트이고, 세돌 쯤 지나 기저귀 떼고 나면 사람 구실을 하게 되는 느낌이 든다고 말한다. 사실 그 뒤에 계속할 말이 많다. 이 때는 이렇고, 초등학교 들어가면 또 이런 미션이 시작되고, 고학년이 되면…. 하지만 그렇게 치면 우리 부모님에게서 나는 완전한 독립을 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러니까 살만해진 것 같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