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기적으로 서울을 떠날 결심을 한다. 일 년에 두 번 정도 결심을 하는데, 그때마다 매번 첫 아이에게 의견을 묻는다. 혹시 서울을 떠나 이사를 하게 된다면 어떨 것 같은지, 어떤 점이 가장 걸리는지 말이다. 며칠 전 하교 후 집에 나른하게 앉아있는 아들이 기분 좋아 보여서 슬쩍 다시 물었다. 그날도 역시 나는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훤아, 엄마는 여전히 이사를 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 이 집에서 오래 살기도 했고, 엄마는 이 동네도 이 집도 좋지만 삶에 변화를 주고 싶거든. 이사 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그때부터 훤이의 입술은 어떤 표정이 적절한지 모른 채 어색한 옅은 미소를 머금었고 눈에는 글썽글썽 눈물이 고였다. 지난번 물었을 때와 대답은 같다. 지금 학교를 계속 다니고 이 집에서 계속 살고 싶다는 것. 그런데 엄마가 왠지 더 진지해 보이니까 살짝 겁을 먹은 것 같다. 진짜 이사를 갈까 봐. 이번에도 나는 아이의 간절한 눈빛에 속절없이 계획을 보류하기로 한다. 아이를 슬프게 하면서까지 내 욕망을 실현해야 하나 매번 고민하면서 결론을 내지 못하기를 여러 번이다.
“알았어. 걱정하지 마. 엄마가 더 고민해 볼게.”
배우는 걸 좋아하는 아이는 학교에서 오케스트라도 하고 스카우트도 참여하고, 주 3회 이상 복싱, 주 1회 역사책 수업을 듣는다. 한 달에 한 번 천문대에 별 보러도 다닌다. 이번 달부터 주 3회 영어학원도 다니기 시작했다. 모두 아이가 원해서 상담을 받고 직접 선택해서 다니는 곳들이다. 그 모든 것들에 변화를 줘야 하는 이사는 분명 쉽지 않은 것은 맞다. 더구나 한가한 지역으로 이주하고 싶은 나의 욕망이 실현될 경우, 다양한 배움의 경험은 지금보다 적어질 것이다. 대신 조금 더 사색하고 집중할 수 있을 가능성은 있을 거라는 기대는 있다. 그러나 만 11년 짧은 인생을 산 아이가 경험해보지 않은 낯선 세계를 선택하기란 쉽지 않을 거다. 나는 조금 더 기다리기를 선택한다.
초여름 날씨를 만끽하기 위해 가족여행을 떠났다. 삼일 째 되는 날, 차를 타고 이동하다가 훤이가 요즘 학교에서 인권교육을 받는다며 이야기를 꺼냈다.
“ 엄마 나는 집에서 인권을 존중받으면서 사는 것 같아. 친구들은 인권수업 할 때 학원선택권도 엄마에게 침해당한다고 다들 난리더라고. 나는 항상 엄마가 의견을 물어보잖아. 그렇지 않은 집이 많다는 걸 알았어.”
“ 그래, 항상 의견을 물어보고 배려하는 게 엄마도 쉽지는 않아. 하지만 당연히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해. 엄마의 노력을 알아봐 줘서 고맙네. “
아이도 가족 구성원의 일원이니까, 나보다 서른 살 적은 아이지만 아이의 의견 또한 중요하다.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는 것 또는 위험하거나 남에게 피해 주는 일이 아닐 경우, 선택의 문제 앞에서는 너의 의견과 나의 의견을 조율해야 한다. 나는 또다시 나의 도시탈출 계획 시기를 수정한다. 어떤 것이 더 옳다고 볼 수 없고, 단지 선택의 문제 앞에서는 너도 나도 평등하니까.
나는 이러다 둘째가 스무살쯤 되어서나 도시를 떠날 수 있는 건가. 나도 아직 나의 선택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더 좋은 방법을 고민하느라 단지 기다리는 중이라고 해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