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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tifreeze 그림책 Oct 19. 2024

슬픔의 언어

새벽을 한참 뒤척이다 당신의 글을 읽었습니다. 서늘함과 적막함을 견딜 수 없어 휴대폰을 손에 쥐었거든요. 잠이 오지 않는다는 핑계로 더 잠이 오지 않을 행동을 한 거죠. 마치 '이해'에 목마른 사람처럼 익명의 공간에서 저를 닮은 사람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던 찰나 당신을 발견한 거예요. 2년 전 가을에 남겨진 당신의 글이 지금의 저에게 닿아 공명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너무나 반가워, 너무나 서러워, 꼼짝없이 울고 말았어요.

오랜 시간 엄마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던 당신은, 그 모든 노력이 보잘것 없어졌다고 고백했습니다. 엄마의 고통이 점점 더 심해지는 걸 보면서 당신은 인간의 존엄이 무엇인지 질문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진 당신은 모든 걸 내려놓고 싶다는 비명을 지른 후 끝없는 침묵으로 사라졌습니다.

당신의 2년을 가늠해 봅니다. 어디선가 밝게 웃고 있을 당신이 그리워집니다.


저는 지금 지하철을 타고 병원으로 가는 길입니다. 오늘은 엄마가 일곱 번째 퇴원을 하는 날이거든요. 5개월 동안 다섯 군데의 병원을 전전하면서 입원과 퇴원이 반복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출근길로 북적거리는 지하철 한켠에서 저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흔들렸습니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어요. 회복에 대한 기대가 번번이 꺾이고 상태가 점점 악화되자, 이제는 매 순간 불안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엄마가 다시 입원하게 될지도 모를 끝없는 내일이 버거워졌습니다.

당신처럼 저도 엄마의 치료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습니다. 의사들의 상투적 표현인 '적극적인 치료'를 아직도 숨이 차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자리를 맴도는 저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치열했던 노력이 이토록 보잘것 없어진 현실에 울분이 차올랐습니다. 숨이 차도록 뛰었던 건 저의 착각이었을까요, 아니면 누군가 저에게 못된 장난을 치고 있는 걸까요. 제 마음은 점점 슬픔과 무기력으로 가득 차고, 제 머릿속은 온갖 비극을 상상하느라 쉬지 못합니다. 이 잔인한 형벌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지하철 역사 안을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각자 자신만의 세게에 몰두하며 서로를 스쳐가고 외면합니다. 이 낯선 시간과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존재들이 유령처럼 느껴집니다. 아니, 제가 유령 같은지도 모릅니다.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다만 저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누군가를 만나고 싶습니다. 저와 같은 슬픔의 언어를 배운 누군가와 밥 한 끼를 하고 싶습니다. 뜬금없는 웃음과 맥락 없는 울음을 부끄럽 없이 보였을 때, 그 의미를 알아차리고 헤아려주는 누군가와 말입니다. 저의 침묵을 기꺼이 믿어주는 누군가가 간절합니다.

저는 당신의 이름도, 얼굴도, 성별도, 나이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정보가 상대를 아는데 중요하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저는 당신에 대해 더 근본적이고 내밀한 이해를 갖고 있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같은 슬픔의 언어를 배웠습니다. 같은 불운을 통과하며 같은 고통을 감각한 것입니다. 이 가혹한 운명이 저만의 것이 아니란 사실에 안도감이 듭니다. 저와 다른 언어를 가진 이들에게 더 이상 슬픔을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저는 이 세상과 단절된 채 점점 고립될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당신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엄마는 또 다른 곳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새삼스레 놀랄 일도 아닙니다. 다만 이 무거움을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가 겁이 납니다. 어디까지 버티는지 보자며 저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이 불운은 언제쯤 끝이 날까요.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전히 살고자 하는 엄마를 보는 것이 고통스럽습니다. 인간의 존엄이란 무엇일까요. 당신은 그 존엄을 지켜냈을까요.


언젠가 운명이 저에게 선의를 베푼다면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눈물 나게 고마웠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당신이 평안하길 진심으로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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