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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랑 Dec 08. 2023

달빛 부용

보통날의 시선 13

지난 1월 현관 구석에 조그맣게 싸놓은 종이 뭉치가 있어 펼쳐 보니 작고 둥근 검은 씨앗이다. 이름을 써놓지 않아 무슨 씨앗인지 알 수 없다. 아마 어디선가 여행길에 채취한 씨앗일 텐데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몇 군데 짚이는 여행지가 있는데 어떤 연유로 이 씨앗을 집에 가져왔는지는 지금껏 생각해 내지 못했다. 다만 색깔에 매료되어서 그만 욕심을 부린 것이라는데 이르긴 했으니, 어쩌면 가장 합당한 이유일 것으로 결론을 내린 상태다. 


봄에 텃밭 귀퉁이나 마땅한 곳에 옮겨 심을 요량으로 베란다에서 놀고 있는 항아리 화분에 씨앗을 뿌렸던가. 무엇이든 새싹이 그렇듯 뒹굴어 다니던 딱딱한 씨앗에서 초록 떡잎이 나오면 대단한 기쁨에 놀라곤 한다. 이 씨앗이 그랬다. 크는 걸 보는 재미로 그냥저냥 놔둔 것이 세상에나 키를 높이기 시작했는데, 옮겨 심을 시기를 놓쳐 버렸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초록 봉우리를 맺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얼마나 폭풍급으로 성장하는지 지지대가 필요할 만큼 아니 베란다를 점령이라도 하려는 듯 커다란 잎이 너울너울 여름을 기웃거렸다. 


인터넷이나 가지고 있는 식물도감을 거쳐 검색대에 걸린 꽃으로 목화가 유력했으나 섬세한 검색라인을 가진 딸은 이내 아니올시다! 라는 결론을 내려주었다. 이름을 모른 채 이 식물과 동거 아닌 동거를 하는 동안 원추형 초록 봉오리가 수십 개 달렸다. 급격하게 성장을 하다 보니 물은 하루걸러 한 번씩 주어야 했다. 여행을 갈 때는 아예 물을 흥건하게 부어 놓고 가야 했고 흙도 추가해 부어 주었다. 거름 없이 이렇게나 풍요로운 성장이 가능한 건지 의아했으나 식물이 가진 우월한 유전자의 힘으로 돌리기로 했다. 


불볕더위가 시작되는 팔월 초 아침 빨래를 널다가 꺅! 소리를 질렀다. 아기 젖니 같은 하얀, 아니 연노랑 꽃봉오리가 고개를 내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이 소리에 저도 놀란 것일까? 이후로 꽃은 수시로 나와 여름과 가을 사이를 환하게 밝혔다. 꽃이 활짝 피었을 때야 비로소 이 꽃이 부용화라는 사실을 알았다. 참으로 흔하디흔한 꽃 중의 하나가 부용이다. 한데 꽃이 피기까지 부용의 키며, 이파리, 줄기의 형태, 심지어 꽃봉오리의 모양도 모르고 있었다. 지금껏 완전체인 꽃만 보려고 고개를 젓고 다녔다는 자각이 들었다. 


한 꽃이 오기까지 얼마나 지난한 시간을 견디며 거슬러 왔는지 눈여겨보지 않았다. 화려한 꽃이 눈앞에 있으면 와~ 예쁘다! 고 끝났다. 얼마나 성급하고 맥락 없는 관심이었는가. 


과정을 지켜본다는 일은 관심을 넘어 그것과 한 호흡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무언의 믿음을 주는 일이다. 너를 믿고 나는 나아가는 것이라고, 무한 신뢰를 주는 일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고 또한 그런 사람을 곁에 두고 싶다. 


사실 처음 있는 일이다. 무엇을 이렇게 거의 일 년여 동안 지켜본 일은. 부용을 관찰하고 지켜본 경험으로 인하여 내 관심의 영역이 아주 조금 성숙해졌다는 걸 느낀다. 무엇을 볼 때 보이는 것만 보지 말자, 그 이면의 상황도 보려고 하자, 그것이 가지고 있는 연결고리는 무엇이 있는지 면밀하게 살피자, 올해 나에게 준 부용의 가르침이다. 

‘달빛 부용’은 그리하여 내가 붙여준 예명이 되었다. 아무리 봐도 달빛이다. 한낮에 보아도, 새벽에 보아도, 저녁 무렵에 보아도 달빛이다. 나만의 ‘달빛 부용’이 이렇게 내 안으로 들어왔다. 


시월 이십사일 경부터 하나둘 씨앗을 수확했다. 처음 몇 개의 씨앗을 파종한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수십 배 늘어났다. 내년엔 세상 밖으로 내보낼 작정이다. 넓은 터에 자리 잡고 마음껏 제가 가진 멋진 달빛을 뿌리기를 바라면서 씨앗을 모았다.   

‘식물들이 하늘의 뜻에 따라 자라도록 내버려두었다’는 좋아하는 캐나다 작가의 글을 읽은 적 있다. 나 역시 부용의 씨앗을 자연에 내버려둘 것이다. 또 누군가 나처럼 부용화와 인연이 닿아 연인인 듯 돌보고 가꾸며 인생의 한 시절 애틋한 조바심과 설렘의 순간을 포착하기를 바란다. 나는 이만하면 충분하다 싶을 만큼 부용화와 잘 지냈으니, 누군가 그대여, 숨 떨리는 달빛에 눈길 한 번 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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