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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논이Noni Aug 11. 2023

냉장고 없이 사는 여자가 부럽기는 처음이었다

 정전으로 다가온 미니멀리즘

32도까지 오른 제주도의 여름 안에서 나는 도서관에 머물며 작은 종이 위에 펜드로잉을 하고 있었다. 시원하다 못해 추운 에어컨 바람에 소음 없는 최신형 공기청정기, 게다가 고급 정수기까지 층마다 갖춘 곳에서 책 읽고, 그림 그리고, 글 쓰는 한여름의 피서 도캉스 + 신선놀음을 즐기고 있던 어느 순간 일제히 전기가 나가며 불이 꺼지고 천장의 에어컨이 작동을 멈췄다. 공기청정기도 퇴장을 알리는 소리를 숨 가쁘게 내며 꺼졌다. 조용하던 도서관이 더 조용해졌다.


'마침 추웠는데 잘됐다!'


얼씨구나하고 에어컨 추위에 껴입고 있던 카디건을 벗고서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작했다. 잠시 후 도서관 직원이 와서 전기가 다시 들어올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달라며 모두에게 양해를 구했다. 전기 없이 일할 수 없는 분들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늘 똑같은 하루하루가 이어지던 지루한 요즘이었는데 갑작스러운 정전으로 일상이 살짝 신선하게 느껴졌다. 마스크를 끼고 긴팔 카디건을 껴입어도 추울 정도로 틀어대는 공공기관의 무분별한 냉방 전력낭비에 살짝 불만도 있었기에 정전이 더 반가웠다. 전기는 국산이지만 원료는 수입산이라는데 에너지의 97% 이상을 수입하는 우리나라에서 전력을 너무 생각 없이 쓰는 게 아닌지 항상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이후 급격한 온실가스배출로 인해 최근 기후변화문제가 심각해져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높아지며 섬나라들은 점점 잠기고 있고(그린피스에 의하면 인천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해안도시들도 2030년에 잠긴다고 한다) 미국 서부와 남유럽은 불지옥이 되어 연일 끔찍한 뉴스가 끊이지 않고 있는데 우린 기후변화에 너무 무심히 사는 것 같아 미래의 후손들에게, 그리고 병든 지구에게 죄책감이 든다. 그래서 이번 여름은 쪄 죽어도 지구를 위해 에어컨을 켜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작년 말 이사 온 집에서는 에어컨을 아직 켜 본 적이 없다. 평소와 같은 전력량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전기요금이 눈이 튀어나올 만큼 확 올라 에어컨까지 켜면 더 비싸질 전기요금을 감당하기 두렵기도 하고, 6월에 왼손을 다쳐 봉합을 하는 바람에 불편하게 지내느라 필터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에어컨을 켤 수가 없었다. 천장에 달린 에어컨은 처음인데 청소하기도 귀찮고 그냥 쓰자니 관리 안 한 에어컨에서 나오는 먼지와 세균으로 인해 호흡기 질환에 걸릴 수 있다고 해서 안 그래도 심각한 비염이 있는 나는 이번 여름을 중고로 산 선풍기를 끌어안고 나기로 했다. 아파트에서 제일 위층인 팬트하우스(라고 하고 싶은 옥탑)에 살아 사막에 사는 기분이지만 그럭저럭 여름을 버텨 벌써 입추와 말복이 지났다.






모든 전기제품이 기절하는 바람에 학생들이 블라인드를 끝까지 올려 자연광으로 책을 보기 시작했다. 펜을 붙잡고 드로잉을 하다 화장실에 가려고 화장실 앞 자동문 버튼을 눌렀는데 정전으로 작동되지 않아 눈앞이 노래진 나는 아래층에 내려가 직원분께 화장실 문이 안 열린다고 하소연했다. 그러자 직원분이 놀라며 회색장갑을 비장하게 끼고 화장실로 가 판토마임하듯 문을 옆으로 쓰윽 밀자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감사한 마음으로 볼일을 보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여전히 정전상태였지만 뼈까지 시렸던 에어컨 바람을 쐬지 않아 기분이 좋았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습하고 따뜻한 바닷바람이 뺨에 닿는 기분이 싱그럽게 느껴졌다. 그때 한전에서 문자가 도착했다.




*고객님의 소중한 재산 보호를 위해 전기설비를 확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재산?

나한테 전기가 없으면 사라질 재산이 있었나?

개털이잖아~ ‘


마음을 놓고있다 그래도 없는 살림에 한푼이라도 잃기 싫어 머리를 굴려보니 악! 있었다!!! 냉동실에 잔뜩 쟁여둔 블루베리들… 며칠 전 마트에서 세일한다고 1.5kg 짜릴 4 봉지나 사재기해 두었던 것이다. 정전상태가 지속된다면 그것들은 가차 없이 녹아내려 흐물거리는 보라색 액체괴물로 변신할 게 분명했다. 거의 넉 달 치 블루베리를 원가보다 싸다고 좋다며 사다 놓았더니 이런 변수가…!


일이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내게 마블 주인공처럼 모든 걸 얼리는 초능력이 없는 한 집에 가서 입김으로 블루베리를 꽁꽁 얼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머릿속은 블루베리 걱정으로만 가득 차 나를 옥죄기 시작했다.


고로케를 유난히 좋아해 두고두고 먹으려고 잔뜩 만들어 얼려놨던 무라카미 하루키가 정전인가 냉동고 고장 인가로 정성 들여 만든 고로케군단을 잃을 뻔한 사고를 수습한 방법이 생각났다. 그것은 마구 먹어치우기였다. 매일 거르지 않고 아침, 점심, 저녁으로 고로케를 먹다 먹다 며칠 지나 완전히 질려버려 고로케가 끔찍해졌다는 언젠가 읽은 그의 에세이처럼 나도 블루베리 6키로를 한꺼번에 입속으로 처넣어야 하나 고민이 됐다. 블루베리는 하루 스무 알이 적정량이라는데 큰일이라며 초조해져가고 있는데 정전되기 전날 읽은 신문기사가 불현듯 떠올랐다.


냉장고도 세탁기도 티브이도 전자레인지도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이 산다는 언뜻 생각해 보면 요즘 세상에 또라이가 아닌가 싶은 어느 베스트셀러 작가의 기사를 인상 깊게 읽고 나도 그분처럼 진정한 미니멀리스트로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아주 잠시 일렁였다. 그러나 상상 속의 난 고군분투 중이었다. 먹기 위해 살아온 내게 냉장고는 보물창고이며 냉장고 속에 꽉꽉 채워진 식재료들은 값진 재산이나 마찬가지니까. 그 작가처럼 매일 소량의 장을 보기도 힘들고 쟁여놓는 걸 좋아하는 내게 냉장고가 없는 삶은 정말이지 힘들 것 같았다. 그러다 정전이 되고 블루베리가 녹을까 노심초사하다 뇌까지 온통 보라색 우동사리로 변할 지경까지 다다르니 냉장고 없이 사는 그녀가 그 순간 너무나도 부러워졌다. 무소유가 진리이고 단순하게 사는 게 최고로 행복하다는 깨우침이 들었다.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현대문명의 이기들은 편리하지만 전기가 없다면 모두 무용지물이 된다.



전기가 다시 공급되고 모든 전자기기가 다시 작동을 하기 시작했다. 안도의 숨이 내쉬어진 순간이었다. 블루베리가 녹을까 괴로워하던 30분도 안 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단순하게 사는 미니멀라이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미니멀까지는 아니지만 나도 나름대로 채식하기, 손수건 쓰기, 면생리대 쓰기(스물일곱 살 때부터 직접 만들어 쓰고 생리통이 사라졌다), 샴푸 안쓰기, 대중교통 이용하거나 걷기, 쓰레기 줄이기, 분리수거하기, 꼭 필요한 물건만 사기 등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환경을 생각하며 살아왔다. 집에 랩과 호일이 없고(없어도 살 수가 있어 놀라웠다!) 그림 그리며 자주 애용하던 아크릴 물감도 이젠 환경보호차원에서 쓰지 않고 있다. 합성수지로 만들어진 아크릴 물감은 수질오염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 가지고 있던 모든 아크릴 물감들은 다 기부했다.


환경운동가인 법륜스님을 90년대부터 따르며 환경 보호를 실천하셨던 엄마는 휴지대신 손수건을 항상 지니셨고, 샴푸를 쓰지 않으셨으며, 폐식용유로 만든 빨랫비누만 쓰셨고, 1회 용품과 화장지 쓰기를 자제하셨다. 예전엔 엄마가 너무 지지궁상같아 이해가 안갔지만 9년 전 돌아가신 엄마의 신념을 이제 내가 물려받아 사는 중이다. 냉장고 없이 사는 작가 이나가키 에미코에 비하면 새발의 피 수준이지만.


소비를 줄이고 단순하게 살아가는 게 우리 모두를 위해 그리고 아픈 지구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지버릇 개 못준다고 여전히 난 예전의 습을 버리지 못해 종종 폭식을 하거나 예쁜 옷, 가구, 침구등을 보면 눈이 돌아간다. 다행히 개털이라 입맛만 다시다 소비욕구를 누르고 환경을 위해 마음을 다잡는다. 내가 산 물건이 언젠가는 쓰레기가 될 것을 알고 있기에 정말 필요한 물건만 사야겠다고 다짐하며.


경제가 성장하면서 우리는 점점 더 많은 물건들을 사들이며 욕구를 채워왔다. 그 결과, 집안은 치우지 못한 물건들로 넘쳐나고, 그 물건들이 우리의 공간과 정신까지 잠식해 나갔다. 미니멀리즘은 그에 대한 반성이었다. 사람들은 진정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제대로 판단하게 되었고 심플하게 살아가는 풍요로움에 공감하며 행동에 나섰다. 산더미처럼 많은 옷들, 식기들, 집기류 들을 정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나가키 에미코의 '먹고산다는 것에 대하여' 중에서



-집크기를 줄이고 물건을 줄이면 생각이나 가치관도 바뀝니까?

"물건이 없어도 괜찮다, 두렵지 않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는 것 같아요. 과거 일본의 고도성장기 때는 물건을 많이 갖고 부자가 되는 것이 행복하고 훌륭하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하지만 앞으로는 그런 걸 목표로 하면 오히려 불행해진다고 할까요. 이제 얻을 수 없으니까요. 없는 것을 재밌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게 오히려 행복한 길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의 삶을 시작하면서 그걸 느꼈습니다."

     -이나가키 에미코. 한겨레 신문 인터뷰 기사 중



없는 것을 재밌다고 생각하는 이 초긍정 마인드의 미니멀리스트처럼 나도 단순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나를 뜯어고치고 있다. 심플해야 천국을 맛볼 수 있다는 어느 명언처럼 천국이 곧 머지않았음을 예견하며...


추신- 2011년 동일본 지진으로 일어난 원전사고로 탈원전을 선언한 뒤 미니멀로 살며 소비하지 않아 남아도는 돈을 기부하고 베풀며 사는 이 존경스러운 작가를 더 알고 싶어 그녀의 책 '먹고산다는 것에 대하여'를 읽고 나니 어떻게 그녀가 냉장고 없이 잘 먹고 잘 사는지 자세히 그려져 있었다. 아사히 신문기자로 살던 시절 그녀는 요리를 삶의 도피처로 여기고 화려한 음식을 요리해먹어 본 역사가 있었고 고급레스토랑에서 온갖 산해진미를 맛봤지만 온갖 양념에 기름진 식재료로 꾸며진 음식을 배불리 먹고 나면 도무지 뭘 먹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진정한 맛을 몰랐다고 한다.


영국에 있을 때 프랑스인 요리사 친구로부터 식당 차리라는 말까지 들었던 나 역시 요리에 미쳐있던 시절이 있었다. 5년 전 채식 시작 후 비건이 된 지금은 식재료 본연의 맛과 향을 중시하며 식품 첨가물 범벅인 가공식품과 배달음식은 자제하면서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밥상을 차려 먹고 산다. 100년 전 냉장고 없이 살던 우리 조상들의 밥상 비슷하게 먹고살다 보니 탐욕스럽던 내가 조금씩 변하고 있는 것 같다. 5성급 호텔 레스토랑에서 먹어본 음식들보다 쌈채소와 먹는 갓 한 현미밥이 더 맛있다.


풀밭위의 식사



요즘 빠져있는 펜드로잉. 고양이 얼굴 빼꼼~



외국인들에게 인기 많은 카페 서귀포 귤꽃다락 부엌을 그리는 중이다.



감사합니다. 더 많은 그림 보러 놀러 오세요!

https://www.instagram.com/nonichoiart/


종이 위에 혼합재료(수채, 잉크) 노니 그림
린넨위에 아크릴. 노니 그림 2012


종이 위에 혼합재료(수채, 잉크) 노니 그림


자작나무 패널위에 유화. 노니 그림
종이 위에 혼합재료(수채, 잉크) 노니 그림


종이 위에 혼합재료(수채, 잉크) 노니 그림




출처 -

https: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4196.html?_ga=2.42617443.790160525.1690940280-560046610.1690940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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