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이벤트 고스포드파크-영국 에딘버러 영화축제에서의 추억
코로나로 온 세상이 난리 나기 전, 평화롭던 2019년 6월, 영국에 머물던 저는 에딘버러 영화제 프로그램 중 하나였던 로리스톤 성 Lauriston Castle에서 상영하는 영화 "고스포드파크 Gosford Park"를 보러 가기 위해 며칠간 들뜬상태였습니다. 시대물을 좋아하는 저를 위해 표를 예매한 D가 그날의 드레스코드는 1930년대 의상이라며 고스포드파크에 나온 그 시대 사람들처럼 차려입고 가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었죠.
1930년...!
아아.. 제가 동경하는 시대의 패션스타일을 착장 해야 하는 꿈같은 순간이 오다니 너무나 설렜어요. 고스포드파크는 2001년 개봉했을 당시 감상했는데 의상과 저택이 아름다웠던 기억만 남을 정도로 시각적으로 많이 인상 깊었고, 다른 영화지만 위대한 게츠비(1920년대)에 나온 의상들을 보며 황홀해했으며, 우리나라 드라마 '시카고 타자기'를 울면서 보며 인생드라마로 꼽을 정도로 1930년대 배경은 왠지 모를 강한 이끌림으로 저를 매료시켰습니다.
코스튬플레이도, 드레스코드가 있는 이벤트도 처음이라 뭘 입고 가야 할지 은근히 고민이 됐지만 내가 영화배우도 아니고 완벽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냥 가지고 있던 프릴이 달린 인어라인의 오래된 청록색 여름 원피스를 입고 가려고 마음먹었어요. 해외에서 10년을 떠돌며 이동을 수도 없이 하는 바람에 웬만한 짐은 다 버리며 삶의 터전을 옮기느라 옷사기 좋아하고 물건 쟁여놓기 좋아하던 저는 외국에서 집시 생활을 하며 강제로 미니멀리즘에 스며들어 꼭 필요한 물건만 사는 사람이 되었고 그해엔 적자로 긴축재정에 들어가 허리띠를 바짝 조여야 했기에 새 옷을 살 계획이 전혀 없었죠. 그런데...
"아.. 저 드레스...! 그래 저건 나를 위해 진열된 거야!"
산책하는 길에 무심코 고개를 돌려 쳐다본 체러티숍(기증받은 물품들을 팔아 자선기금을 모으는 중고품 가게-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가게'와 같음. 영국의 체러티숍 수는 11200개. 아름다운 가게는 한국에서 108개의 매장이 운영 중) 쇼윈도에 진열된 검정 드레스에 눈이 튀어나올 만큼 반해 홀린 듯 들어가 점원의 도움으로 옷을 입어보았어요. 실크처럼 광택이 나는 부드러운 검은색 새틴 공단천으로 만들어진 롱드레스는 가슴이 깊게 파인 파격적인 디자인으로 제가 입기엔 아주 많이 길었지만 길바닥 청소도 공짜로 해줄 겸 그 자리에서 간택되었답니다. 가격표도 그대로 달린 새 옷에 어딘지 모르게 귀티 나던 그 이브닝드레스의 체러티숍 판매가는 단돈 10파운드였습니다(원래는 중저가 보세). 우리나라 돈으로 15000원. 2만 원도 안 되는 그 드레스를 입고 100년 전으로 타임슬립할 생각에 영화제 이벤트 참석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어요.
드디어 그날이 다가왔어요.
워낙에 빈약해 영혼까지 끌어모은 드레스 완료.
헤어는 옆머리를 살짝 땋아 뒤로 묶어 한데 모아 말아 올린 다음 가지고 있던 오래된 큐빅머리끈으로 마무리.
신발은 그해 봄에 다른 체러티 숍에서 4파운드(6천 원가량)에 장만한 와인레드 색상의 벨벳구두.
장갑은 고증을 위해 끼고 싶었지만 고작 한 번의 이벤트를 위해 또 다른 지출을 하는 건 낭비 같아 고무장갑을 끼려다 말았어요.
메이크업을 공들여 마치고 검정 나비넥타이에 검정 슈트를 근사하게 차려입은 D와 함께 로리스톤 캐슬로 향했습니다.
6월의 날씨임에도 서늘한 스코틀랜드의 초저녁 바람이 스산해 들고 온 겨울 코트를 껴입고 성에 도착하자 집사로 코스프레한 멋진 남자직원이 옛날식으로 정중히 인사하며 맞아주었어요.
로리스톤 캐슬은 16세기에 지어져 19세기에 증축이 된 유서 깊은 성으로 마음씨 아름다운 성 주인이 1926년에 성 전체를 에든버러에 기부한 후 지금은 에딘버러의 여러 박물관 중 하나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성에 살던 마음씨 고운 성주 덕분에 로리스톤 성은 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며 잊지 못할 추억을 간직하게 된 박물관이 되었답니다.
로리스톤 캐슬에 가고 싶으신 분들은 클릭하세요.
https://www.visitscotland.com/info/see-do/lauriston-castle-and-gardens-p245841
고상한 그림액자로 빼곡히 채워진 벽면을 따라 레드카펫이 깔린 계단을 오르자 다이닝 룸과 드로잉 룸 등의 우아한 공간이 펼쳐졌어요. 아름다운 가구들을 바라보며 신이 나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누군가가 찰칵찰칵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게 느껴져 쳐다보니 토토로가 중앙에 큼지막히 프린트된 티셔츠를 입은 오타쿠 같은 웬 영국남자가 쉴 새 없이 셔터를 누르고 있었어요. 모르는 사람이 동의도 없이 사진을 찍어대길래 흠칫 놀랐지만 알고 보니 영화제에 고용된 전문 포토그래퍼였습니다. 토토로를 사랑하는 남자가 커다란 전문가용 카메라를 들이대며 우리의 사진을 마구 찍어대는 게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그는 한없이 무해해 보이는 얼굴이었고(토토로도 한몫함), 사진으로 그날의 기록을 남기는 게 영화제의 일환이라 그저 어색한 웃음만 입가에 흘리며 어정쩡한 포즈를 취할 뿐이었죠.
"Oh so cute! Everybody's so cute!!!"
사진사는 카메라 렌즈에 담긴 사람들이 모두 귀엽다며 감탄사를 연발했어요. 백 년 전 의상을 멋지게 차려입고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을 렌즈 안에 끊임없이 담으며 행복해하고 진정으로 자신의 일을 즐기던 모습이 참 좋아 보이던, 이 성에 온 사람들 중 유일하게 캐주얼한 차림이던 포토그래퍼 토토로 덕후님, 근사한 사진들 정말 감사해요.
Atmosphere | Gosford Park
15th June 2019
Image © https://www.chrisdonia.co.uk/about (사진작가 웹사이트)
사진 출처 : New Media Scotland
성안에서 사진을 찍고 집사의 안내를 받아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야외 뒤뜰 한편에 마련된 공간에 다다랐어요. 와인과 와인잔이 테이블에 줄지어 놓여있는 걸 본 저는 공짜술이라면 환장을 하던 술고래였기에 더욱 기뻐져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답니다.
이벤트에 참석한 인원이 모두 모이고 드디어 집사로 코스프레한 박물관 관계자들이 와인을 따르기 시작했어요.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기분이 업돼 사진을 찍으려 폰으로 열심히 구도를 잡는 도중 제 손에 스친 와인잔이 금속으로 만들어진 테이블 위에 쓰러지고 쨍그랑 소릴 내며 깨지고 마는 소란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바람에 와인이 저의 드레스 치맛자락에 쏟아져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죠. 집사가 달려와 잔을 치워주고 D는 정리를 도와줬지만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데 그때 주변의 여자분들이 괜찮냐며 물었어요. 그 아름다운 드레스에 와인을 쏟아서 어떡하냐고 걱정해 주는 분들께 웃으며 괜찮다고 안심을 시켜줍니다.
'돈워리! 이 드레스 체러티숍에서 15 파운드 주고 산 싸구려라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귀부인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기에 고상한 척 입을 다물었습니다.
간단한 와인파티가 끝나고 이벤트의 백미인 영화를 보러 실내로 들어갔어요. 윗니와 아랫니가 닥닥 부딪힐 정도로 추웠던 영화 상영장소에서 코트를 껴입고 거의 두 시간을 덜덜 떨며 고스포드파크를 감상하고 성 밖으로 나오니 해가 지고 밤이 짙어지고 있었습니다. 영화처럼 살인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영국인들만 가득하던 스코틀랜드의 고성에서 동양에서 홀로 온 한국여자가 와인잔을 깨는 작은 소동이 벌어진 그날의 기억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집니다.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해 준 고마운 D도 생각나고 4년 넘게 살았던 아름다운 에딘버러도 떠올라 로리스톤 성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잠시 회상에 잠겨보는 시간을 가져 행복했어요.
사서 딱 한번 입어본 그 이브닝드레스는 2년 전 영국을 떠나며 체러티숍에 기부하고 왔습니다. 기념으로 가지고 있을까 고민도 했지만 2년 동안 한 번도 입지 않은 옷들은 과감히 제 삶에서 없애기로 결심했기에 미련은 없어요. 사진으로 남았으니 그걸로 충분합니다.
로리스톤 성을 펜으로 간단히 그려봤어요.
더 많은 그림은 노니의 인스타에 오셔서 감상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