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스 시팅(집주인이 집을 비우며 여행하는 동안 빈집을 돌보며 머무는 일)을 인연으로 친구가 된 전직 의사 제니의 집에서 알츠하이머 환자인 제니의 아버지를 돌보던 도중 에딘버러에서 하우스 시팅 요청이 들어와 2주간 검은 고양이 코코와 잭 러셀 테리어(Jack Russell Terrier) 애니의 임시 집사로 지내는 행운을 얻었어요. 이미 코코와 애니의 집에서 2016년에 하우스 시팅을 했던 적이 있어 아이들이 저를 잘 따랐고 집의 구조도 익숙했기에 순조로운 하우스 시팅이었습니다.
노견 애니. 그래도 귀여운 바둑이♡
몸은 늙었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청춘이라오. 내 사랑을 받아줘 청년~ ....누님이 정 그러시다면..
사냥개의 피가 흘러 민첩하고 영리한 애니. 질투심도 장난아니었어요. 제가 코코를 쓰다듬으면 난리가 났답니다.
코코와 애니는 서로 소 닭보듯 전혀 친하지 않았어요. 작은 연필초상화를 그려 하우스시팅을 마치고 집주인인 아담과 제인에게 선물로 주고 왔습니다.
뒷마당에서 코코, 애니와 함께 찰칵. 코코는 이듬해 무지개 다리를 건너고 말았어요.
애니와 매일 아침 에딘버러에서 아름다운 산책로로 유명한 Hermitage of braid에서 한 시간가량 함께 걷고 집으로 돌아와 식사 후 그림을 그리거나 에딘버러 페스티벌을 둘러보고 귀가한 다음 저녁을 먹고서 짧은 저녁 산책을 하는 것이 2주간 하루 일과였습니다.
직접 보면 더 아름다워요.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좋아하신다면 '에딘버러' 강력히 추천합니다.
Hermitage of braid 들어가는 입구 근처
Hermitage of braid의 휴식처 오래된 오두막을 개조해 만든 카페
시냇물을 따라 내려오다보면 온갖 꽃들과 농작물들이 자라는 층층 텃밭이 있습니다.
후두두둑-
여느 때처럼 긴 아침산책을 하는 도중 먹구름이 꾸역꾸역 몰려오기 시작하더니 제법 굵은 빗줄기가 내리기 시작했어요. 소나기를 피해 커다란 나무 아래 잠시 머물며 애니의 목줄을 채우고 여름에도 서늘한 스코틀랜드의 날씨에 한기를 느껴 후드티 모자를 깊숙이 뒤집어쓰고선 비가 멎기를 기다리는데 같은 나무 아래에서 검은 반점의 개, 잉글리시 스패니얼과 함께 비를 피하던 짧은 머리의 중년 여성이 말을 걸어왔습니다. 날씨로 악명 높은 영국에서 가장 핫한 소재인 날씨 이야기를 시작으로 서로의 개에 관한 이야기도 이어집니다. 애니가 작고 귀엽다는 그녀의 말에 고맙다고 하며 얘는 내 개가 아니고 잠시 Dog sitting 중이라 에딘버러에 2주간 머무는 중인데 폴커크에서 알츠하이머 걸린 할아버지를 돌보고 있지만 9월에 이사를 나와 지낼 방을 구하고 있다고 덧붙였어요. 그러자 그 여인 눈빛이 반짝이더니
"Oh! Are you looking for a room? I have got a graet idea."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는 말에 귀 기울여 보니 혼자 사는 친구가 치매에 걸려 걱정되는데 마침 그 집에 빈방도 많으니 저더러 와서 그녀를 돌보며 지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이었어요. 집 구하러 다니는 시간도 굳고 방세도 굳는 좋은 기회였지만 치매환자를 돌보며 지내는 일은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굉장히 부담되는 일이기에 고민도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스위스에서 여든아홉세의 중증 치매 할아버지를 돌봤던 경험도 있고, 마침 알츠하이머 걸린 할아버지도 돌보고 있으니 할머니는 좀 더 수월할 것 같아 생각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미친 듯이 퍼붓던 비가 멎어 우리는 서로의 번호와 이메일 주소를 교환한 뒤 헤어졌고 며칠 뒤 세라로부터 이메일이 왔어요. 자신의 집에서 매기(치매 걸린 친구) 그리고 매기의 남동생과 함께 만나 이야기를 해보자는 내용이었죠. 일종의 면접 같은 것이었어요. 처음으로 가 본 세라의 집은 아름다운 집들이 즐비한 모닝사이드라는 동네(에딘버러에서 부촌)에 있었는데 하얀 아가펜터스가 곱게 핀 아담하고 깔끔하게 정돈된 정원이 인상 깊었어요.
세라의 정원에 핀 하얀 아가펜터스 꽃들. 너무 예쁘죠? 아프리칸 릴리라고도 합니다.
초점 없는 눈동자의 매기와 남동생을 만나 쿠키와 홍차를 대접받으며 인터뷰를 하기 시작했어요. 매기는 결혼을 한 번도 하지 않아 남편도 아이도 없이 혼자 살고 있던 중에 치매에 걸려 생활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기본적인 살림도 할 수 없게 되어 근처에 사는 사촌이 종종 들러 음식을 가져다줘서 끼니를 해결하고 있었습니다. 가끔 집 밖에 혼자 나가 몇 시간이고 사라질 때도 있다는 이야기에 가엾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생각보다 상태가 좋지 않은 매기와 함께 살게 된다면 굉장히 힘이 들 것이 예상되어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며칠 후 하우스 시팅이 끝나 폴커크로 돌아와 세라와 메일을 주고받으며 협상을 시작했어요. '매기를 위해 이런저런 뇌 건강에 좋은 신선한 요리를 매 끼니마다 만들 것이며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니 미술치료도 시도할 것이다. 치매환자가 매일 그림을 그리게 되면 뇌세포 노화를 늦춘다는 연구결과가 있듯이 적극적으로 매기의 뇌 건강과 평온한 일상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겠다' 고 했습니다. 얼마의 보수를 원하는지에 대해서도 묻기에 원하는 액수를 써 이메일을 보냈지만 매기의 남동생은 제게서 방세를 안 받는 대신 거의 무보수로 일하기를 희망하는 의견을 피력했어요. 그렇게 협상을 하는 도중 매기의 남동생과 사촌이 매기의 집을 팔고 매기를 사촌의 옆집에 이사시킨다는 갑작스러운 결정을 통보받았습니다. 이에 세라는 제게 너무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하며 (제게 에딘버러에서 방 구하지 말라고 했었거든요) 두 달 동안 자신의 집에 와서 지내며 방을 구하라는 제안을 했습니다. 이게 웬 떡인가요! 그 좋은 집에서 두 달이나 묵다니요! 그 당시 막 은퇴를 한 세라는 인도와 프랑스로 두 달간 여행을 갈 예정이었고 그때 세라의 개가 노환으로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일이 생겨 그녀의 집에는 몇몇 화분들만이 임시 집사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운 좋게도 3층짜리 예쁜 집에서 독채로 혼자 두 달이나 지낼 수 있었어요.
세라는 친절하게도 왕복 두 시간 거리를 운전해 제니의 집으로 와 짐 운반을 도와주었고 처음 며칠 동안 세라가 여행 가기 전까지 함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나무 아래에서 우연히 마주쳐 단 두 번 만난 검은 머리 이방인을 집으로 초대해 가장 넓은 손님방을 내어준 마음씨 좋은 분께 보답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림 프린트를 액자에 넣어 선물해드리고, 직접 그린 스위트피 꽃 그림을 숙박비 대신드렸으며 한국음식을 만들어 대접하고 재미난 말동무도 해드리자 홀로 적적하게 지내던 세라는 제가 마음에 들었던지 마음을 열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꺼내놓았어요.
"남편은 이 집에서 죽었고 난 그 후로도 계속 살고 있어요. 25년을."
어쩐지 네 번째 손가락의 결혼반지가 쓸쓸하게 빛나던 세라에게 그런 사연이 있었다니 크게 놀라 씹던 음식이 넘어가질 않았어요. 결혼하고 2년 뒤인 한창 신혼을 즐길 나이 서른다섯에 암으로 남편을 잃은 세라는 런던에서 태어나 직장을 스코틀랜드에서 구하고 남편을 만나 정착했습니다. 타지에서 올라와 친구도 많지 않았을 텐데 지금까지 이 집에서 씩씩하게 살아온 것을 보면 참으로 강인한 여성이면서 아직까지 반지, 웨딩드레스, 남편의 사진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걸 보면 마음이 아주 여린 사람 같았어요. 만약 제가 결혼을 했는데 남편이 2년 만에 죽는다면 힘들어서 바로 다른 곳으로 이주하거나 몇 년 후 새 남자 만나 새 출발 했을 거예요. 요즘 세상에 어떻게 25년을 수절할 수가 있나요. 이 지고지순한 여인네의 순정은 상을 줘서 인정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어서 열녀문을 부활시켜 영국에 세워야 합니다! 풉.. 머리에 쪽지고 소복 입은 백인 아주머니 세라의 모습을 상상해보다 뿜습니다.
일주일 후 세라는 여행을 떠나고 두 달간 저는 세라의 아름다운 집에서 홀로 자유로운 생활을 만끽했습니다. 그녀의 집에는 여러 그림들이 벽마다 걸려있었는데 그중 다이닝 룸에 걸린 가장 큰 유화는 그림을 모르는 사람이 봐도 굉장히 멋져 보일 정도로 비쌌고 그 외에도 수많은 진품 그림들이 집안 곳곳을 빛내며 장식 중이었어요.
예술을 사랑하는 귀부인이구나!
떠돌이 그림쟁이는 이 럭셔리한 마님과 친하고 지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집니다. 은퇴한 세라의 전직이 궁금해 여쭤보니 소프트웨어 회사를 운영하다 마침 좋은 가격에 팔고 바로 은퇴를 한 CEO였다고 합니다. 회.. 회장님! 어쩐지 포스가 장난 아니더라니~ 혹시라도 미천한 이 그림쟁이의 그림도 사주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회장님 곁에서 두 손바닥을 열심히 비벼가며 손금과 지문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충성을 다해 모시기로 결심했습니다. '딸랑딸랑~ 전 회장님의 영원한 종입니다~' (연식이 가늠되는 유행어 기억나세요? 제가 초등학교 때 전국적으로 유행했던 회장님 우리 회장님에서 나온 유행어죠)
그렇게 길에서 우연히 만나 친해진 세라는 작년 말 제가 영국을 떠나 귀국하기 전까지 4년 동안 좋은 친구로 남아 서로의 집에서 요리를 만들어 저녁 초대도 하고. 함께 차를 마시고 산책도 하고, 세라가 중요한 일이 생겨 자리를 비운 동안 새로 입양한 강아지 코스모도 가끔 돌보며 친분을 쌓아갔어요. 제가 만들어 대접한 오색찬란한 비빔밥을 유난히 좋아하던 세라에게 혼자서도 만들어 먹어보라며 고추장과 참기름을 선물하기도 하고, 요리를 즐겨하지 않던 세라가 열심히 레시피북을 보며 만든 음식을 맛보기도 하며 미식으로 혀를 풍요롭게 하는 맛깔스러운 시간도 종종 가졌습니다. 한 번은 세라의 친구들을 많이 초대해 잡채, 불고기, 김밥, 부침개 등의 잔치 음식을 잔뜩 만들어 한식의 세계화도 펼쳐봤답니다. 영국 노년층도 사로잡은 K 푸드 역시 대단해요!
그리운 작업실. 2018년 에딘버러 세인트 마가렛트 하우스에서 작업하던 시절입니다.
한 번은 작업실에 초대해 홍차와 스콘을 대접하는데 연필로 그린 양귀비 그림을 보는 세라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더니 제게 수채화로 그린 양귀비 꽃 그림을 몇 점 그려달라 주문했어요. 그렇게 세라는 두 해에 걸쳐 제게서 양귀비 그림을 일곱 점이나 구입했고 멋지게 표구해 집안을 예쁘게 꾸몄습니다.
히말라얀 양귀비. 블루포피. 종이 위에 수채. 노니 그림
붉은 양귀비. 종이 위에 수채. 노니 그림
하얀 양귀비. 이 꽃은 엄마가 오래전 정원에 가꾸셨던 흰 양귀비를 사진으로 찍어 간직하다가 주문 들어왔을때 보고 그렸어요. 종이 위에 수채. 노니 그림
주름 그리느라 눈이 아팠던 오렌지빛이 감도는 붉은 양귀비. 종이 위에 수채. 노니 그림.
노란 양귀비. 종이 위에 수채. 노니 그림
세라가 특별히 주문한 캘리포니안 양귀비. 종이 위에 수채. 노니 그림
붉은 양귀비. 종이 위에 수채. 노니 그림
세라의 침실을 빛내던 나의 아가들. 그림을 팔게 되면 좋은 집에 입양보냈다고 생각해요.
동남아 여행을 자주 다니던 세라는 한국에 한 번도 와본 적은 없지만 오래전 남편의 남동생이 한국인 여자분과 결혼해 한국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 부부는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세라가 조카의 사진을 보여준 순간 깜짝 놀랄 정도로 그 미모에 홀딱 반해버렸습니다. 역시 혼혈이 참 매력적이에요.
이 글을 쓰며 귀인이자 회장님에 열녀인 세라와 함께 한 에딘버러에서의 추억에 잠겨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어 감사합니다. 한국음식을 사랑하고 언젠가 한국에 꼭 놀러 오고 싶어 하는 세라를 위해 관광가이드가 될 그날을 기다리며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