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건강하시던 엄마가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쓰러지셨다는 청천벽력 같은 비보를 듣고 정신없이 귀국을 한 뒤 병원으로 달려가 다섯 시간의수술 후 혼수상태에 빠진 엄마와 눈물로 상봉했어요.
"엄마, 나야, 나왔어!"
제가 온 걸 아신 듯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흐르던 엄마는 이틀 후 세상을 영영 떠나셨고 곧 장례식이 이어졌습니다.
'꿈일 거야. 이건 꿈이야!'
유언도 없이 황망히 가버리신 엄마가 그리워 울기만 하던 악몽 같은 시간은 영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이어졌어요. 끝없이 밀려오는 애별리고(愛別離苦)로 미친 듯 방황하던 제게 위로가 된 건 술(지금은 안 마시지만 부끄러운 과거)과 친구들(지금은 페이스북 친구로만 남은 유럽인들), 그리고그림이었습니다.
브라이튼 바닷가에 자리한 JAG 갤러리에 작업실을 구해 그림을 그리고 펍에서 라이프 드로잉 클래스도 매주 다니며 그림을 그렸어요. 작업실에 가지 않을 땐 바닷가에서 엄마를 위해 기도를 하고 밤에는 친구들과 한잔 술로 순간의 쾌락을 즐기며 충격을 잊으려 애썼습니다. 잠시라도 혼자 있을 때면 자동으로 눈물이 나와 뭐든 정신없이 해야 했기에 바쁘게 살아갔지만 반 미친 상태의 알코올 의존증 + 우울증 초기 증세로 위태롭던 넋 나간 여자에겐 세상이 그저 멍한 상태로 느껴졌어요.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괴로운 마음 부여잡고 갈피를 잡지 못하다 도저히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느닷없이 브라이튼 기차역으로 향했습니다. 영국의 기차역에는 피아노를 연주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공공 피아노가 놓여 있어요. 그중 런던에 있는 세인트 팡크라스 역의 피아노는 세계적인 가수 엘튼 존이 시민들을 위해 기증한특별하고흥미로운 피아노입니다.
런던 세인트 팡크라스 역의 엘튼 존이 기증한 피아노. https://stpancras.com/news-events/sir-elton-john-s-piano
처음 브라이튼 역에서 피아노를 발견하고 당장 달려가 치고 싶었지만부끄러운 마음에 그냥 지나치고꼭 한 번은 건반을 만져보리라 다짐했어요. 주목받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이 성격에 대중 앞에서의 연주 도전은 쉽지 않았지만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겨났는지 소심한 제가 일탈을 강행하기로 작정했지요. 좋아하는 피아노를 치면 왠지 마음이 치유될 것 같았고 엄마 잃은 슬픔이 잠시나마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생각에 용기를 내어 무거운 피아노 뚜껑을 열고 심호흡을 한 뒤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어요.
열 살 때 피아노를 1년 반 배워 대단한 실력이랄 것도 없이 그냥 들어줄 만한 연주 실력을 가진 제가 악보 없이 칠 수 있는 곡은 서너 곡이었고 그중이루마의 River flows in you를 치고 있었습니다. 연습 부족으로 실수를 거듭하며 피아노를 치던 중 웬 영국 신사가 연주해줘서 고맙다며 따뜻한 말을 건네는동시에 바람처럼 뒷모습만 보이며 지나갔고 제 얼굴은 불타는 고구마처럼 벌게졌어요. 놀라움과 수줍음에 손가락이 건반을 엇나갔지만 기분은 살짝 좋아졌어요.
'나 좋자고 치는 건데 모르는 사람에게서 고맙다는 말도 듣고 너무나 감사하다.정말 피아노 연주에 치유의 힘이 실렸나 봐.'
그렇게 한층 업된 기분으로 피아노를 치고 있는데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져 연주를 멈췄습니다.
"Yi Ru Ma?"
똑똑히 들린 이루마라는 말에 놀라 뒤돌아보니 20대 여성이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서있었어요. 저는 너무 놀라 맞다고 이루마 곡 연주 중이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하자 그녀는 자기가 이곡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또 얼마나 한국 음악에 빠져있는지 흥분한 말투로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K팝을 비롯한 한국 문화에 관심이 지대해 카톡도 깔아 두고 한국어도 열심히 배우고 있다는 그녀의 설명에 온몸에 전율이 흘렀습니다. 그렇게 한국이야기로 꽃을 피우다 연락처를 주고받고 그녀는기차역을 떠났습니다.
멀고 먼 타향에서 한국인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이루마의 곡을 연주하다 우연히 만나게 된 M은 우아하고 예쁜 외모만큼이나 상냥하고 사랑스러웠어요. 저렇게 아름다운 영국소녀가 한국문화에 푹 빠져 있다니! 국뽕에 취해 신들린 듯 피아노를 조금 더 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엄마가 돌아가신 후로 처음 걸어보는 행복한 꽃길이었습니다.
며칠 후 그림을 보러 오고 싶다는 그녀를 작업실로 초대해 차를 마시며 친목을 도모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영어, 스페인어, 한국어까지 3개 국어를 할 수 있던 똑똑한 그녀는 대학에 다니면서 일까지 병행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10년이 넘는 긴세월을 어머니 병간호하며 살고 있던 효녀이기도 했어요. 나이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어른스러운태도와 차분한 말씨가 암에 걸린 어머니 간병하느라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생각하니 마음이 짠했어요. 열 살이 넘는 나이 차이지만저보다 더 성숙하고 어른 같았던 그녀의 진중하고 차분한 언행은 모든 사람의 호감을 살 만큼 평온하고 사랑스러웠어요.
"'별이' 이란 이름 어때?"
순 한국말로 된 한국 이름을 가지고 싶다며 제게 의견을 묻던 그녀는 '별이'란 이름이 자기는 좋은데 다른 한국 친구가 촌스럽다고 했다며 살짝 의기소침한 모습이었어요. '별이'란 이름이 어디가 어때서 촌스럽냐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이름일 뿐이니 전혀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켜 주었습니다. 내 친한 친구가 첫 아이를 가졌을 때 부르던 태명도 '별이'였고, 너의 눈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빛나고 예뻐서 그이름이아주 잘 어울린다고 덧붙여 주자 알겠다고 이름을 '별이'로 하겠다며 환하게 웃던 그녀가 생각나요. 그렇게 별이로 불리게 된 그녀는 언젠가 한국에 꼭 오고 싶어 했고 저는 한국에서 좋은 곳만 데려다주겠다며 가이드를 자청했어요.
별이를 집으로 초대해 잡채와 미역국을 만들어 대접하고, 불교신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다니던 교회에 초대받아 방문해 보기도 하며 6개월간 조금씩 친해지던 우리는 제가 귀국을 해야 할 날이 다가와 한국 음식점에서 친구들과 작은 송별회를 가졌어요. 영국을 떠나며 갤러리에서 팔던 그림 프린트들을 액자에 넣어 친구들에게 선물로 나눠주고 별이에게는 연필로 그린 그림 프린트를 주었어요. 오리지널도 아닌데 너무나 감격해하던별이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The Age of Innocence. Pencil on paper by Noni 2005
영국 이스트본에서 머물 때 그리던 모습
송별회에 모인 친구들은 모두 입을 모아 그림 속 여인이 꼭 별이와 닮았다고 이야기했고 별이는 거의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고맙다고 하며 평생 간직하겠다고 했어요. 그렇게 작은 것에도 커다란 감사를 표하던 순수한 별이.. 그게 그녀와의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3년 후 제가 자원봉사로 치매 할아버지를 돌보며 스위스 바젤에 머물 때 그녀의 페이스북에 의문의 피드들이 넘쳐나 놀란 마음으로 자세히 살펴보다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별이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충격적이고 슬픈 소식에 가슴이 아파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어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내 어떻게 된 거냐고 묻자 교통사고였다고 합니다. 스물다섯어린 나이에 하늘의 별이 된 별이를 위해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했습니다. 부디 별이가 좋은 곳에 가기를 간절히 기도했어요. 후회도 파도처럼 밀려왔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자주 연락할 걸.. 영국에 있을 때 더 많은 추억 만들걸..
후회의 눈물이 흘러 앞을 가렸어요.
그녀가 갑작스레 떠난 지도 5년이 되어갑니다. 그녀가 떠난 봄이 다시 오는군요. 별이의 아주 친한 친구는별이가 죽은 것 같지가 않아 미친 듯이 슬프지도 않고 죽었다고 죽은 게 아니라는 말을 했어요. 처음엔 그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영적 성숙을위해 마음공부를 하며 조금은 알게 되었어요. 인간으로서의 별이는 죽었고 그 형태는 사라져 눈에 보이진 않지만 에너지는 사라질 수 없다는 걸. 그녀는 어딘가 좋은 곳에 다시 태어났을 수도 있어요. 그곳이 그녀가 그렇게 사랑하던 한국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워져요. 노래를 무척이나 잘하고 피아노도 잘 치며 K팝을 누구보다 아끼던 그녀였으니 어쩌면 한국에서 미래의 아이돌 스타가 되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별이는 누구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니 하나님께서 특별히 별이를 천국으로 일찍 데려가셨을 수도 있어요. 하나님은 착한 사람을 곁에 두고 싶어 하신다잖아요.
영국 하늘
영원히 곁에 있을 줄만 알았던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그토록 사랑스럽던 어린 친구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스위스에서 자원봉사로 돌봐드리던 치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30대에 연이어 접하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생로병사에 대해 고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조금은 철이 든 40대가 되면서 언제 갈지 모를 한 번뿐인 짧은 인생 조금이나마 행복하고 즐겁게 살다 가고자 늘 감사하고 긍정적인 마음자세를 지니기 위해 명상과 채식, 백팔배를 시작하고 엉망진창으로 살던 지난날을 참회하며 산지 3년이 넘어갑니다.아직 더 수행해야겠지만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이 행복해요. 지금 현재에 늘 깨어있고 순간을 즐기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우리의 본래 마음자리는 불생불멸이다. 오지도 않았으니 가지도 않았으므로 여여한 것이 우리의 본래 모습이다. 때문에 부처님은 나고 죽음, 즉 생사가 없으며 오고 감이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는 바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중생들 자체가 생사가 없다는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