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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의 발칙한 원숭이와 나무늘보

호캉스가 싫은 호강녀의 누사두아, 울루와뚜 이야기

by 논이

처음으로 발리에 왔을 때 우붓에서 환상적인 일주일간의 휴가를 마치고 인도양 해변이 아름다운 발리 남서부에 위치한 누사두아로 향했다. 창밖으로 탁 트인 바다 전망이 끝내주는 호텔방에 체크인을 하고 입꼬리가 발리의 푸르른 하늘까지 올라간 상태로 짐을 풀고 근사한 저녁도 먹었지만 호캉스가 하루 이틀 이어지자 점점 지겨워지고, 호강에 겨워 요강에 뭔가를 누기 시작했다.


호텔방에서 바라본 오션뷰

누사두아는 국가차원에서 조성된 고급호텔 및 리조트가 밀집된 지역으로 환경이 깨끗하고 보안이 철저해 안전하지만 해변에 호텔단지만 이어져있어 호캉스를 즐기지 않는 내겐 몹시도 지루한 천국처럼 느껴졌다. 호텔을 예약한 친구에게는 미안했지만 너무 재미없었다. Sloth(나무늘보)가 별명인 친구는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잠자고 느지막이 일어나 수영장에 가서 맥주를 마시며 썬배드에 널브러져 폰을 보는 게 최고의 휴가라고 여기는 전형적인 서양식 바캉스를 즐겼다. 예전엔 나도 나무늘보와 같은 생활습관을 지녀 새벽 두세 시에 잠들고 늦게 일어났지만 나이가 들며 아침형 인간으로 조금 변했다. 그래서 아침에 곤히 자는 영국산 나무늘보를 내버려 둔 채 홀로 배 터지게 조식을 먹었고, 어릴 때 물에 빠진 적이 있어 수영도 못해서 수영장에 있는 게 마냥 즐겁지만은 않아 호캉스가 지겨워진 것이다.


어딘가로 여행을 가면 새로운 곳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탐방하고 그곳만의 역사와 전통을 엿보며 경험을 중요하게 여기는 내 기준에서 봤을 때 발리에선 우붓이 최고였다. 바다가 보이는 높은 지대의 제주도 집에서 3년을 넘게 살아서인지 물멍 후 공허함과 우울함을 선사하는 바다보다 눈을 싱그럽게 정화해 주는 초록이 우거진 정글에 더 끌리고, 불어오는 바람에 흙냄새 맡으며 푸르게 펼쳐진 논을 바라보는 건 그야말로 파라다이스였다.

35도에 육박하는 땡볕아래 썬배드에 누워 호주에서 온 어린애들의 울부짖는 괴성을 들으며 수영장에 있는 것보다 가슴까지 파랗게 물드는 논 뷰 보며 차분하게 달착지근한 코코넛 마시는 게 훨씬 더 좋았다. 어린이들을 좋아하지만 버릇없이 소리 지르고 발을 구르며 발광하는 애들은 피하고만 싶다. 한국애들에 비하면 호텔수영장의 버릇없는 호주애들은 괴물이 따로 없었다. 한국과 일본에도 놀러 왔던 나무늘보는 동양아이들이 참 조용하고 얌전하다며 가정교육 잘 받았다고 극찬을 했다. 그가 개개인을 너무 존중하며 오냐오냐 키우는 서양의 양육방식에 문제가 있다며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한국아이들을 고운 눈으로 바라본 기억이 난다.


호텔에 나무처럼 들러붙어 있는 나무늘보에게 맞춰주려 호텔에서만 죽치고 있자니 우울증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 같아 황금 같은 발리에서의 첫 휴가를 이렇게 망칠 순 없어 주변의 갈만한 곳을 구글맵으로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판다와 비치라는 곳이 괜찮아 보여 석양이나 보러 가볼까 하다 발리의 명소 울루와뚜 사원이 눈에 들어왔고 차로 45분이나 걸리지만 왠지 꼭 가야 할 것 같은 느낌에 나무늘보에게 같이 가자고 졸랐다. 고맙게도 그는 내가 가자는 곳에 군말 없이 따라와 줬다.


그랩으로 차를 불러 누사두아에서 울루와뚜까지 가는 길은 울퉁불퉁 구불구불해서 휴화산의 마그마가 부글부글 끓듯 멀미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고 쓰고 신맛의 불쾌한 위액이 조금씩 느껴졌다. 부실한 달팽이관을 소유한 죄로 차멀미에 취약한 나는 어릴 때부터 키미테를 달고 여행을 했고 비닐봉지는 필수였다. 거의 쏟아내기 직전에 도착해서 천만다행이었지만 해가 지려는 찰나에 티켓을 사고 석양을 못 볼까 봐 조마조마해졌다.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을 따라 가자 드디어 울루와뚜 핫스팟에 다다랐다. 멀미로 인한 위액과 함께 버무려져 초조하던 마음이 절벽 위에 세워진 울루와뚜 사원과 바다를 보고 그만 확 풀려버렸다. 지상낙원이 그곳이었다. 사진을 미리 보긴 했지만 비교도 안되게 실물이 훨씬 환상적이었다. 역시 장엄한 풍경은 직접 눈으로 봐야 한다.


절벽에 부딪혀 하얗게 부서지던 파도와 보랏빛으로 서서히 물들어가던 파파야색 노을의 환상적인 저녁 하늘을 바라보며 자연의 위대함에 고개가 절로 숙여지고 모든 근심걱정이 절로 사라졌다. 지금까지 살면서 본 절벽 뷰 가운데 단연코 최고였다. 멋진 저녁 풍경을 보러 온 수많은 사람들의 행복한 표정을 보는 건 덤이었다. 행복은 전염되니까. 울루와뚜에는 인도네시아와 교류와 협력이 활발한 인도인 관광객들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유럽인도 상당히 많았으며 한국인들도 종종 볼 수 있었다. 우린 둘 다 사람 많은 건 질색을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곳에선 기쁨만이 솟아올랐다.



사실 울루와뚜에 가기 전 악명 높은 원숭이에 대한 글을 보고 걱정을 살짝 했었다. 나무늘보가 발리로 합류하기 전 우붓에 혼자 있을 때 트로피칼뷰 카페에서 빈땅 맥주 마시고 취해서 혼자 몽키포레스트에 가 원숭이를 그저 귀여워하며 사진 찍고 구경하기 바빴는데 울루와뚜 사원에 가기 위해 정보를 수집하다 보니 깡패, 마피아, 조폭, 도둑놈 등등 발리 원숭이에게 붙은 수식어가 가관이었다. 원숭이한테 스마트폰을 뺏긴 건 예사였고, 얼마나 사람이 우습게 보였으면 가져가기 힘든 귀고리, 신발 등을 강탈당한 사람들의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사연도 읽었다. 어떤 외국 여성은 가방을 빼앗겼는데 눈이 휘둥그레진 원숭이가 가방 안의 물건을 꺼내더니 신이 나서 여권을 갈기갈기 찢고 있는 영상도 있었다. 여권주인의 망연자실한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그러다 발리를 사랑하는 한국인 블로거의 포스팅을 보니 울루와뚜에 서식 중인 악명 높은 원숭이들은 어떤 중년 발리남자한테서 물건을 훔치는 훈련을 받고 뺏긴 관광객이 패닉에 빠져 있으면 자기가 찾아다 주겠다며 돈을 요구하고 원숭이들에게 물건을 돌려받아준다고 했다. 들뜬 마음으로 발리에 여행 온 관광객들 등쳐먹고 불쾌한 경험을 선사해 주는 그 현지인의 사진도 볼 수 있었는데 행색이 남루하고 빌어먹게 생긴 게 왜 저러고 사나 불쌍해 보였다. 그런 이유로 현지인 가이드를 고용해 운전기사 겸 보디가드로 알뜰하게 데리고 다니는 한국분들도 있다. 가이드들은 막대기를 필수로 들고 다니며 사람에게 달려드는 원숭이들을 후려 패 용사처럼 막아낸다고 한다. 가이드 강추 후기를 읽어보니 어떤 한국여자분은 남편과 발리에 여행 와서 가이드를 고용해 울루와뚜에 왔는데 마치 영화 속 휘트니 휴스턴이 된 것처럼 보디가드 양반에게 홀딱 반해있었다. 그는 온몸을 날려 원숭이로부터 한인부부를 용감하게 지켜내고 순박하고 선량한 인상으로 부부의 발리 남부 여행을 멋지게 장식해 주었다고 한다. 남편분 왠지 위기의식 느끼지 않으셨을까 궁금해진다.


이런저런 깡패 몽키 정보를 접하고 우리도 울루와뚜 가기 전에 나름대로 준비를 했다. 나무늘보는 원숭이가 접근하고 물건을 훔치려 하는 동시에 그것들 아구창을 날리겠다며 펀치 하는 동작을 내 앞에서 여러 번 선보인 채 아주 비장한 눈빛으로 이글거렸다. 나 역시 부채를 가방에 넣으며 원숭이들이 몸에 붙으면 바로 부채를 접어 때려 혼내주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도 원숭이를 때리면 동물학대라는 생각에 찜찜했다. 도둑심보 가진 노인네에게 훈련받은 불쌍한 원숭이에게 폰 뺏기는 것보다 나을 거란 생각이 드는 반면 순수한 동물이 무슨 죄인가 싶어 미안하고 불편했다. 현지 가이드들도 막대기 들고 뚜드려 팬다는 얘기를 들으니 괜찮을 거라 합리화시켰지만 다행히 우리가 만난 울루와뚜의 원숭이들은 더위에 지쳐서인지 인파에 주눅이 들어서인지 사람을 공격하거나 물건을 훔치지 않았고 그저 앉아서 묵묵히 자기들의 일을 할 뿐이었다. 과일을 먹는다던지 서로의 털 속에 숨은 이를 잡는다던지 몽키들 나름대로 바빠 보였다.


석양이 황홀하던 울루와뚜.


울루와뚜에 다녀온 다음날 나는 여전히 자고 있는 나무늘보를 자게 내버려 두고 수영장을 벗어나 바닷가로 갔다.

푸른 하늘과 맞닿은 발리의 바다가 밀물에 백사장까지 밀려와 더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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