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는 엄마 Nov 18. 2023

어쩌면 유서

이 글의 이름이 무엇이 될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누군가, 혹은 당사자들에게 이 글이 전해질 때에는 내가 어떤 모습일지, 나와 그들과의 관계는 어떤 관계일지는 모르겠다. 하루에도 열두 번 오락가락하는 마음을 잡고 있노라면 어떤 순간에는 조금은 괜찮아지는 듯하다가 또 어떤 순간에는 그냥 다 내려놓고 내가 나를 파괴하는 것으로 그들에게 괴로움을, 일말의 죄책감이나 괴로움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이다. 


 나는 장림초 강의를 다녀오던 14일 그 분과의 통화에서 직접 들었다. 지하철에서 나이 많은 아주머니들이 텃밭 농사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서 그분이 생각이 났다. 그전 주에 발표가 났어야 하는 강사 최종 합격자에서 탈락이 되었다고 생각해 일주일간 마음 앓이를 했던 내 속사정 때문에 안부전화도 차일피일 미뤘던 것이 죄송해 전화를 드렸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삼랑진 집을 판 것에 대해 세금이 많았다는 이야기에 왜 그렇게 세금이 많았냐고 되묻는 내게 해운대 집이 공동 명의라서 1 가구 2 주택에 해당이 되어 세금이 많았다며, 이번에 아버지 명의를 정리해 둘째 아들에게 넘겼다고 말씀하셨다. 당황스럽고,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 뒤 얘기들은 네 네하고 전화를 끊고 남편에게 전화했다. 남편은 그런 일이 있었다고, 동의서를 써줬다고 했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고 하자 언젠가 혼자 해운대를 갔을 때라고 한다. 추측해 보자면 10월 16일 남편 직장의 창립 기념일에 남편은 시댁을 찾은 적이 있다. 그날 또는 그즈음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 시기에 남편과 나는 약 삼 주간을 싸웠다. 남편은 계속 기분이 저조했고, 결국 마지막 싸움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내게 남긴 게 뭔데?”라고 말을 해서 나는 어리둥절했었다. 우리 싸움에 아버지 이야기가 왜 나오나 하는 황당함이었다. 그 뒤 시어머니 생신이 있었고, 남편은 집에서 상을 차린다 어쩐다 하다가 결국 나가 사 먹는 걸로 진행했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시어머님의 강압에 남편은 부모 자식 형제간에 재산으로 싸우는 게 싫어서 원치 않지만 동의서를 써줬고, 그게 스트레스가 쌓이니 부부싸움은 계속되었으며 나에게는 약 삼 주가 지날 동안 말하지 않았다는 것. 그 와중에 시어머님은 아버님의 지갑에 있던 30만 원을 너 가져라고 했고, 남편은 먹고 떨어져라 하는 것 같아 받지 않았으며, 그래도 착한 아들이고 싶어서 원하시는 대로 집에서 생신 상을 차리려고 했다는 거. 나는 이 모든 사실을 모른 체 혼자 계신 시어머님이 안쓰러워 남편에게 자주 전화드리라고, 주말이니 찾아뵙자고 종용했던 것. 


 이 모든 상황 앞에서 “너는 유산 노리고 그간 행동한 거냐.”라고 하면 억울하다. 처음 결혼했을 때는 똑같이 해줘야 해서 먼저 결혼한 둘째에게 해준 전세금과 동일한 금액을 제외한 아파트 값을 현금으로 보내라고 하셔서 송금했다. 그렇게 살다 보니 잘하는 아들에게 더 주겠다고 하셨단다. 그리고는 최근에는 미국 나가있는 둘째네가 한국에 들어와 살고 싶을 때 살 곳은 있어야 하니까 지금 사는 곳은 둘째네를 주겠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모든 것의 답은 처음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미국에 이민 간 둘째네가 매일 영상통화를 드려도 결국 아픈 아버지를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찾아뵙는 것은 우리였다. 아버님이 시술을 할 때도 휴가를 내고 있었던 것은 남편이었고, 내내 간병하는 시어머님과 잠시라도 교대하려고 강의하고 넘어와 돌봄 교실에 있는 아이를 찾아서 병원 가서 교대해서는 배고파하는 아이를 달래 가며 시아버님 곁에 있었던 것은 나였다. 물론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부부끼리도 꺼내어 내색하지 않았다. 시어머님이 오 년 간 간병의 대부분을 하셨고,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한 것뿐이기 때문이었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었다. 그리고 올해 아버님의 장례를 치르는 사이 시어머님은 비행기 티켓이 비싸다고 미국에 있는 둘째네는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장례비 역시 아버님과 남편의 손님들이 낸 부의금에서 처리했고, 둘째네는 빚지기 싫어 주변의 부의를 알리지도 않았고, 장례비를 따로 내지 않았다. 

 미워하고 싶지 않다. 남편의 동생도, 시어머니도. 그런데 미워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이미 미워하고 있다는 말이겠지. 시어머님이 직접 말씀하셨듯 시댁의 사랑의 표현은 '돈'이다. 이 집의 문화는 돈이 단순히 돈이 아니라 사랑의 표현이다. 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남긴 주식은 아직 손해가 크니, 어머니가 쓰셔야 하니까 어머니가, 집에서 아버지 명의 분만큼은 둘째가 안쓰러우니 둘째를 주겠다며 첫째 아들에게 강제적으로 동의서를 받아낸 이곳에서. 나는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 현기증과 구토를 느낀다. 나에겐 시간과 노력과 마음씀이 사랑이었다. 내가 얼마나 호구로 보였으면. 그게 내가 느끼는 억울함이다. 그분에게는 이렇게 해도 흥, 저렇게 해도 흥 하니까 내가 호구였구나, 이제껏 내게 제대로 된 해명조차 하지 않는 남편에게 나는 그저 값싼 노동력이었구나 하는 빗나가는 마음까지. 


 애써서 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싶다. 이미 벌어진 일, 그들 모자에게 내 감정이 놀아나질 않기를. 나는 그냥 나로서 잘 살기를 바라고 바라며 이 미움을 덮고 오늘을 살아가길 바라며 걷고 또 걸었다. 첫날은 울고, 둘째 날은 나가서 혼자 술을 마시고, 셋째 날과 넷째 날은 종일 유튜브만 보다가 남편이 온 넷째 날 저녁과 오늘은 그냥 나가서 걸었다. 이 일이 내 인생에 벌어진 것을 받아들이려 애쓴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 글을 이혼장에 첨부할 것인가, 그분에게 우편으로 보내고 죽어버릴 것인가를 고민한다. 어느 로터리에서 차를 돌린 것을 후회한다고 했던가. 나는 그 전화를 받았던 것을 후회한다. 집이 있으니 결혼을 종용하던 그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그렇게 후회를 하다 보면 결국에 나는 내가 미워진다. 

작가의 이전글 나는 왜 그녀들을 엄마의 자리에 앉혔던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