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차 수리를 맡기려 사상 쪽으로 갔다. KG모빌리티 서비스센터라는 곳이다. 옛 쌍용자동차가 이름을 바꿨다. 거기까지 가니 가까이 있는 친구가 생각이 났다. 전화를 했다. 명지에서 도금공장을 하는 친구다. 이 더위에 얼마나 더울지....
마치고 들러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전화를 하니 바로 받았다. 차 수리 때문에 사상 쪽에 왔으니 나중 얼굴이나 보자고 했더니 바로 나오겠단다. 그때가 3시30분이었다. 내가 차 맡기고 4시30분까지 그곳으로 가겠다니 기어코 자기가 나오겠단다.
"공장은?"
"닫아뿌면 된다."
"아이다. 내 때문에 그라지 말고 일해라. 내가 가서 좀 기다리면 되지“
친구는 그러면 내가 오래 기다려야 하니 바로 공장 문 닫고 나온다고 했다.
"마침 오늘이 복날이라던데 니 오리백숙 먹제?"
"어"
"그라모 하단에 '오리명가' 쳐서 그리로 온나."
수리 견적을 내는데 시간이 좀 걸리는 듯 했다. 그래서 예상보다 늦게 출발해 도착을 하니 4시 50분이었다. 주인이 자리로 안내를 했다.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도착했나?"
"어"
"내도 다 왔다. 쪼매 기다리레이“
조금 있으니 문으로 들어오는 친구가 보였다. 반갑게 정말 반갑게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고1 때부터니 어느새 몇 해 있으면 50년을 사귄 친구다. 친해진 건 고 3이 되어서였다. 그전엔 내가 무서워서 피했다는 친구다. 같은 동네에 살았는데 당시 골목에서 우리가 후배들 지도하는 걸 보고 오해를 한 것이었다. 그 당시 내가 교회 학생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그래서 주변 어머니들이 늘 우리에게 당부를 했다.
"야야, 우리 아 잘 좀 챙기도레이"
"예, 어무이. 걱정 마이소. 잘 챙겨보께예.“
나와 친구들은 어무이들 부탁을 받고 쪼끔만 껄렁거리거나 눈에 거슬리는 나쁜 행동을 하는 녀석들은 바로 훈육을 했다. 그때 다소 과격하게 지도해야 할 상황도 있었는데 아마도 그런 모습을 본 것 같았다.
고2때 한 친구의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 가셨다. 돌아가시기 전에 바짝 여윈 손으로 내 손을 꼭 잡고 당부를 하셨다.
"영호야. 우리 ○○ 잘 좀 부탁한다. 니가 항상 잘 좀 챙겨주라.“
어머니도 누나들도 그랬다. 나는 아버지의 부탁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충실히 지켰다. 그런데 그랬던 친구가 나중 군 제대를 하고 난 뒤 경찰이 되었다. 그 뒤론 그 녀석이 날 더 챙겨줬다.
오리백숙이 익고 친구가 내게 한 그릇을 떠준다. 다리 하나씩을 나눴다. 소주잔도 부딪쳤다. 늘 바쁜 친구라 몇 번의 만남시도가 불발이 되었다. 이런 저런 얘기 중에 갑자기 친구가 돌아가신 어머니 얘기를 하며 분위기가 숙연해 졌다. 너무 불효를 한 것 같아 늘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어머니 생각이 나면 차를 몰고 한참을 내달려야 마음이 다소 안정이 된다고 했다. 돌아가신 지가 벌써 10년이 지났다. 친구는 고1 때 아버지를 잃었다. 갑자기 돌아가셨다. 심장마비였다. 그때 어머니가 서른 후반이셨다. 친구 집이 우리 집과 같은 골목에 있었다. 우리 집과는 100m도 채 안 되는 거리였다. 그런데 그 때는 친하지 않아 왕래가 없었다.
그 당시 친구들이 우리 집에 오는 걸 좋아했는데 이 친구는 고3 이전에는 한 번도 안 왔다. 고3때 가서야 친해져서 서로의 집을 왕래했다. 당시는 친구의 어머니는 내 어머니고 아들의 친구는 곧 당신의 아들이었다. 어머니들이 참 고생을 많이 하셨다. 우린 그게 늘 가슴이 아팠다. 둘 다 가난한 집 장남이라 참 많은 고민을 나눴었다. 친구 어머니는 아들에게 역정을 많이 내셨는데 친구는 그걸 또 받아주지 못하고 어머니께 모질게 한 게 가슴에 한이 되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젊어서 남편을 잃고 아들에게 의지를 하셨을 거다. 그러다 때로 삶에 지치면 친구에게 그걸 쏟아 내셨을 거다. 그때 어머니는 아마도 아들을 남편처럼 여겼을 거다. 그래서 신랑한테 역정을 내듯이 아들에게 한탄을 쏟아내신 걸 거다. 우린 그런 얘기로 한동안 소주잔을 비웠다.
"누가 뭐래도 넌 효자였어. 내가 알아"
그때 내 전화가 울렸다. 어머니 전화였다.
"별일 없나? 전화가 없어서 전화해봤다."
"예, 어머니. 전화드릴라 하면 날이 지나고...늘 그러네요. 몸은 괜찮으시지요?"
"오늘 복날이라는데 삼계탕이라도 하나 문나?“
어머니는 누나랑 매형이랑 여동생이랑 나가서 드시고 오셨다고 했다. 막 내려주고 누나와 매형은 가고 여동생은 운동하러 헬쓰장 갔단다. 어머니는 멀리 구미에서 여동생이랑 같이 지내고 계신다. 가슴이 아프다. 불효자는 정작 친구가 아니라 바로 내가 불효자다. 어머니는 언제나 내 가슴속 멍울이다. 아프다.
"오늘 복날이라 ○이 만나서 오리백숙 먹고 있습니다."
친구가 어무이냐고 눈짓을 했다.
"○이는 잘 살고 있나?"
"예, 잘 살고 있습니다. ○이 전화 바꿔볼께요.“
친구가 전화를 바꿔서 어머니랑 통화를 하는데 금방 눈물이 맺히는 게 보였다.
'어머이 건강하시지예. 어머이 목소리 들으니까 목이 메이네예.....“
한참을 통화를 하고 건강하시라는 당부를 하며 전화를 마쳤다. 어머니는 올해 아흔넷(94)이시다. 아직은 정정하시지만 사람 일을 어찌 알겠는가? 그 나이에도 당신보다는 아들 건강이 더 우선이다. 그게 어머니 마음이다.
어머니와의 통화 후 친구는 아마도 더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이 날 터였다. 이날 소주는 둘이서 두 병만 마시고 자리를 옮겼다. 예전 같으면 둘이서 최소 대 여섯 병은 깠을 거다. 그런데 나이가 드니 다들 절주를 하고 있었다. 커피숍으로 갔다. 가벼운 얘기로 전환했다.
이 친구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다. 예전 내가 입시학원 강사를 할 때다. 그날 비가 정말이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창문을 때리니 집중이 잘 안됐다. 수업이 제대로 안 되고 있었다. 그때 창가 쪽 여자 얘들이 술렁였다.
"아니 이것들이 미쳤나? 뭐야 임마?"
"쌤~~~저 밑에 진짜 멋진 남자가 있어요.“
여자애들의 호들갑에 나도 창가로 가 내려 다 보았다. 거기에는 우산도 없이 모자에 판쵸우의만 입은 공군장교가 서서 교실을 올려 다 보고 있었다.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어??...쌤 친군데."
"에이 거짓말 마세요. 어~어~ 나랑 눈 마주쳤어.“
얘들에게 잠시 자습하라고 하고 급히 내려갔다. 친구는 갑자기 내가 보고 싶어서 달려 왔다고 했다. 실상 근무지 이탈을 한 거였다. 운전병한테 바로 부산으로 가자하고 차를 몰았다는 거다. 사무실에 물어보니 내가 저기쯤 교실에서 수업을 하고 있으려니 하고 쳐다보고 있었단다. 교무실로 가서 잠시 기다리라고 했지만 녀석은 얼굴 봤으니 됐다면서 바로 돌아섰다. 찐한 포옹을 하고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차에 올랐다. 나는 지프가 멀리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 서 있었다. 덕분에 나는 홀딱 다 젖었었다.
남자인 내가 봐도 참 멋있었다. 그래서 나는 육해공군 중에 공군장교들이 입는 판쵸가 제일 멋지다고 생각한다.
일주일 뒤 나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송탄까지 갔다.
친구네 아파트는 수위도 헌병이었다^^~♡
우리는 서로가 연애할 때의 모습이나 심적 괴로움을 느낄 때나 모든 걸 잘 안다. 서로가 벽이 되고 빛이 되는 존재가 아닐까 한다.
그렇게 오래 만에 만나 동안의 안부를 묻고 헤어졌다. 예전처럼 코가 삐뚤어지게 마시는 건 없다. 그래도 좋다. 반주삼아 한잔씩 하면서 얘기 나누는 것만으로도 모든 건 다 공유되고 풀린다. 그게 친구다.
"친구 아이가. 친구끼리는 미안한 거 없다.“
영화 '친구'속의 대사가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