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훈 May 28. 2023

그녀와의 하룻밤

"술은 가능한 마시지 마세요"


그녀는 단호한 어조로 내게 명령하다시피 말했다. 그녀는 나의 정신건강과 주치의다. 스트레스 지수가 높고 공황장애 증상이 있다는 진료결과에 따라 약을 복용한지가 거의 일년이 되어 간다.

그동안 그녀와는 10번정도의 면담진료가 있었다. 그녀는 내 말과 눈빛만으로도 나를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선생님, 저녁대접을 하고 싶습니다."

"... "


대답이 없는 그녀에게 나는 오늘 저녁 어디어디에서 기다리겠노라고 말하고 진료실을 나왔다.

약속시간...  

물론 나혼자의 무모한 약속 시간이지만 종일 시간이 멈춘 듯 했다.


나는 일찌감치 약속장소인 일식집으로 가 기다리기로 했다. 사장님과는 익히 알고 지내는 사이라 대충의 이야기를 알려주고 양해를 구했다. 그녀가 오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그에 대한 양해였다. 여차하면 나혼자 저녁을 먹고 가야할 판이었다. 시간이 다가올수록 초조해져 갔다. 나 혼자만의 일방적 약속에 도도한 그녀가 올까? 동안 나는 그녀에게 나의 세세한 부분까지 상담을 받았다. 그때마다 그녀는 차가운 어조로 엄마나 누나처럼 내게 지시를 했다. 잠을 푹 자라. 술 마시지 마라. 약 잘 챙겨 먹어라. 모든게 지시사항이었다.


그때다.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이방입니다. 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왔다. 아... 순간 나는 당황했다. 막상 그녀가 오니 허둥대는 나였다.


"선생님,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녀는 가벼운 목례만 하고 앞자리에 앉았다. 정신과 주치의와 밖에서 갖는 면담 시간 같았다.


우리는 그녀가 알고 있는 나의 취미얘기와 내가 하는 일과 나의 현재상황에 대한 얘기로 제법 많이 사사로운 얘기를 가볍게 나누었다. 기적같은 일이다.

술은 시키지 않았는데 사장님이 설중매를 가지고 직접 왔다.

가볍게 한잔 하시라고...

내가 그녀에게 눈짓으로 물었더니 그녀가 예쁜 입술로 말했다.


"한잔만 드세요. 취하지만 않으면 되요. 특별히..."


사장이 나와 그녀에게 한잔씩 따라주었다. 나도 사장님께 한잔을 따랐다. 셋이서 원샷을 했다. 술 맛과 향이 입안과 코끝과 가슴을 적셨다. 사장님이 한잔씩을 더 권한다. 난 또그녀에게 눈짓으로 물어보았다. 그녀가 괜찮다는 신호를 눈짓으로 준다. 오히려 사장과 그녀의 얘기가 많았다. 자기도 예전에 공황장애를 겪은적이 있다는 둥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아예 둘이 술도 주거니 받거니 했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재밌게 듣고 있었다.


사장이 나가고 둘만의 시간이 되었다. 이미 주치의와 환자의 관계는 지나 자연인으로서의 대화를 했다. 그녀가 약간의 취기가 오르는지 얘기가 많았다. 내게 늘 차가운 말만 하던 그녀가 아니었다. 피식 웃는 미소도 예뻤다.


그녀가 차를 가지고 와서 대리운전을 시켰다. 그녀의 집이 우리 집을 지나 있어 가는 길에 내가 내리기로 하고 같이 가기로 했다. 그녀가 약간의 취기가 있는듯 해 혹  모를 상황을 대비해 나는 카운터에 얘기해 비닐 봉투 하나를 달라해서 챙겼다.


기사가 오고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그녀의 아파트를 얘기하고 중간에 날 내려달라고 부탁을 했다. 차가 출발하자 그녀가 몸을 내게 기댄다. 취기가 올라오고 있는 것 같았다. 아까 마지막으로 소주를 한병 시킨게 탈인듯 했다. 생각보다 술이 약한데 왜 그렇게 주는대로 마셨을까. 비닐봉투를 챙기기를 잘했다. 나는 기사에게 중간에 세우지 말고 그녀 아파트까지 바로 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를 데려다 주고 택시를 타고 올 요량이었다. 그때 그녀가 울컥 토했다. 비닐봉투를 꺼내 받아내고 등을 토닥이고 휴지로 입술을 닦아주었다. 그녀가 배시시 웃는다. 술취한 모습이 예뻤다.


그녀의 아파트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그녀의 호수를 물었다. 집까지 부축해 바래다 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기사를 보내고 그녀를 부축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녀가 내게 몸을 기댄다. 그녀의 가슴이 뭉클 느껴졌다. 야릇했다. 시간이 멈추었으면 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21층까지 가는 게 왜그리 순식간인지.

그녀의 호실앞에 와서 나는 인사를 했다. 들어가 쉬라고. 그녀가 들어가자는 눈짓을 보냈다. 잠시 들어와 자기 가족들과 인사하고 가란다. 어쩌지...그녀의 가족들한테 뭐라고 말한다 말인가? 잠시 고민하는 차에 문을 열고 그녀가 외쳤다.


"엄마왔다"


아이들이 쪼르르 달려왔다. 그녀는 애들을 안고 입을 맞추고 머리를 쓰다듬고 난리였다. 몇마린지...

몸도 못 가누던 그녀가 어디서 힘이 났는지 쪼그리고 앉아 애들을 일일이 챙기고 있었다. 애들은 나한테도 꼬리를 흔들며  달려 들었다.


"아참 내 정신봐. 선생님 쇼파에 잠시 앉아 계셔요. 차한잔 드릴께요."


혀꼬인 소리를 숨기려 애쓰며 말하고 그녀는 약간 비틀대며 주방으로 갔다. 그녀가 비틀거리며 포트에 물을 부었다. 위태로워 내가 말렸다.


"아니 선생님이 앉아 계셔요. 제가 할께요"


그녀를 부축해 쇼파에 앉혔다. 뒤돌아보니 개를 안고 입을 맞추고 쓰다듬고 깔깔거리고 있었다. 보기 좋았다. 그런 그녀가 귀여웠다.

뭐지??  도대체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10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그녀에게 물어 홍차를 두 잔타서 쇼파에 갔다. 이런...그녀가 그새 잠이 든 듯 했다. 흔들어 깨우니 손만 휘젖는다. 어느새 개들도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이 넓은 집에 그녀 혼자만 사는 걸까? 인기척은 없었다. 내가 조심스레 거실을 지나 방문을 열어 보았다. 안방인듯한 곳은 커다란 침대와 협탁 그리고 맞은편에 티비뿐이다. 그런데도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입구쪽에 방을 열어보니 서재 같았다. 의학서적이 대부분이었다. 다른 방은 옷방이었다.


어떡하지 쇼파에 그냥두고 나갈 수는 없었다. 그녀를 안방침대에 눕히기로 했다. 생각보다 무겁다. 그녀를 던지듯이 침대에 눕혔다.

겉옷은 벗기는게 좋을 듯 했다. 몸을 이리저리 뒤척여 겨우 윗옷을 벗겼다. 치마는 그냥둬야겠지. 아무래도 그게 맞을 듯했다. 더웠다. 밖으로 나와 시원하게 물을 한잔 들이켰다. 언제 왔는지 말티스 한마리가 다리곁에서 꼬리를 살랑이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가 측은해 보였다. 어떡하지? 이쯤했으니 이제 가도 될 듯 했다. 안방을 들여다보니 그녀가 치마를 벗고 누워 있었다. 잠결에 무심히 한 행동같았다. 팬티스타킹을 입고 있었다. 이제 이불이나 덮어주고 가면 될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 보니 예뻤다. 코로나로 인해 병원에선 늘 마스크를 쓴 모습만 보았었다. 눈매가 예뻤다. 얼굴전체를 본건 오늘이 처음이다. 예쁘다. 술취해 잠든 그녀 얼굴은 병원에서 보아왔던 차가운 이미지는 아니었다.

내가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가 눈을 떴다. 두팔을 들어 내 목을 껴안았다. 그녀가 나를 끌어 당겼다, 키스를 했다. 달콤하다. 아까 토하고 난 뒤 입도 헹구지 안았는데도 그녀의 입술은 달콤했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걸까? 어쩌다 이렇게 됐지? 지금 이 여잔 취중이다. 멈춰야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녀의 키스는 더 격렬해져 갔다. 내가 그녀를 떼어내자 그녀가 말했다.


"선생님, 부탁이 있어요."

"무슨..."

".... 그냥 제 옆에 잠시 누워 있어 주세요"


그녀는 이제 술이 어느정도 깬 것 같았다. 내가 조용히 그녀 옆에 누웠다. 그녀가 내 가슴에 얼굴을 가볍게 올렸다.


"고마워요 선생님"

"..."

"사실 선생님이랑 진료면담을 할 때 저는 제가 더 위안을 받았어요."

"..."

"정신과 의사지만 실은 저도 외로웠거든요"

"..."

"그런데 선생님과 면담을 하면 오히려 제가 치료받는 느낌이 들었어요. 선생님이 처한 상황이 저와 비슷했고 그래서 그런지 선생님과 진료면담을 하면 오히려 제가 편안해졌어요."

"..."

"선생님 당돌한 부탁이지만 오늘 저랑 같이 있어 주세요"


그녀의 눈을 보니 거절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녀를 꼬옥 안아 주었다. 그녀와 나는 정확히 12살 띠동갑이다. 진료면담 중에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동안 우린 알게 모르게 남녀의 관계가 아닌 그 어떤 정신세계로 엮어진 듯 했다. 내가 오늘 그녀를 병원 밖에서 보자는 것도 그것의 연장선상이었다. 의사와 환자 사이가 아닌 인간대 인간으로서의 얘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녀에게 그러겠다고 동의를 하고 잠시 전화를 하겠다고 침대를 벗어났다, 아내에게 전화를 해 줘야 할 것 같아서다.

뭐라고 하지? 언제나 날 믿어주는 아내에게 오늘 거짓말을 둘러대야 한다. 나는 아내에게 갑자기 친구가 죽었다고 하고 어제 밤에 죽어 내일 아침 출상이라고 친구들과 밤을 새우고 내일 장지까지 가야할 것같다고 둘러댔다. 아내는 언제나처럼 내 말을 믿어 주었다. 미안했다.


안방으로 오니 그녀가 샤워를 한듯 욕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긴 타올을 걸치고 살짝 웃었다.


"선생님. 저 때문에 땀 많이 흘리셨을텐데 좀 씻어세요"


난감했지만 나도 그러고 싶었다. 온 몸이 끈쩍거리고 있었기 대문이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드라이로 머리를 말리던 그녀가 내 머리를 말려주었다.


우리는 침대에 나란히 누었다. 둘 다 벌거 벗은 채였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 오늘은 그냥 이렇게 누워있어요. 그냥 이렇게 누워서 선생님을 느끼고 싶어요. 섹스없이요"

"..."

"섹스를 하면 선생님을 못 볼거 같아서요"


나는 그녀의 말 뜻과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있을거 같았다.

나는 그녀를 꼬옥 안아주었다. 잠시 뒤 그녀의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한손으로는 나의 그것을 살짝 쥐고 있었다.

아주 평온한 얼굴이다. 천사같았다. 여린 마음으로 지금껏 강한척하고 지내왔을 그녀가 안스러웠다. 그녀의 봉긋한 가슴을 어루만지며 나도 잠이 들었다.



작가의 이전글 잃어버린 기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