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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작가 Jun 29. 2024

제주도에서 소젖짜기

초6 도시남의 버킷리스트

4월에 아이 참관수업이 있었다. 앳되고 뽀얀 피부를 가진 20대 젊은 선생님이셨다. 우리 후니는 한 해가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가는 와중에 선생님 소개가 이어졌. 중저음으로 깔리는 다나까체의 말투가 반전이다. 어쩌면 우리 후니에게 많이 배우기도 하는 한 해가 되겠구나 싶었다. 곧 중학생이 될 아이들이라 반 분위기기가 어떨까 궁금하기도 하고 선생님과의 하모니가 어떤 소리를 낼 지도 기대가 되었다. 교실에 들어가니 아이가 나보다 더 먼저 나를 알아보고 쑥쓰러운 미소를 보낸다. 벌써 여섯번째라 익숙해질만도 한데 교실에 있는 아이는 이번에도 낯설다.


선생님께서는 올해 안으로 꼭 해보고 싶은 일들 5가지를 발표해보자고 하셨다. 민재라는 아이는 아주 어른스럽다. 첫번째 버킷리스트는 영국에 가서 토트넘 경기를 직관하는 거라고 했다. 그러자 몇몇 아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선생님께서 궁금한 게 있으면 손을 들고 질문해도 된다고 말씀하시자 번개같이 손을 들어 ‘누구 팬이에요?’, ‘축구하는것도 좋아해요?’ 등 관심이 몰린다. 남자아이들 중에 축구팬이 꽤나 많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끼리 자연스럽게 소속이 생기는 듯하다. 여자아이들은 역시 야무지다. 독서를 100권 하겠다, 글을 쓰겠다, 일본 여행을 가겠다, 부모님께 효도를 하겠다 등등 기특하다. 걔 중 한 아이는 이 모든 버킷리스트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공부를 잘 해서 목표하는 중학교에 붙는게 우선이라고 얘기한 친구도 있었다. 일하거나 사정이 있어 참관을 못한 몇 엄마들의 몫까지 아이들 하나하나에 열심히 응원을 보냈다.


우리 아이는 반원 25명 중 25번이다. 아쉽게도 시계가 벌써 수업시간을 넘기고 있었다. 농구나 축구를 하긴 해도 스포츠 자체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다. 독서와 공부도 자발적이라고 할 순 없다. 과연 이 아이의 버킷리스트가 뭘까 나도 궁금했다. 시간도 촉박한데 아이 이야기가 그냥 묻어가듯 끝나는건 아닐까 초조함도 올라왔다. 두두둥. 수줍은 매무새가 진하게 풍겼지만 그래도 꽤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제주도에 가서 소젖 짜고 감귤 따기, 집에 있는 구피 마릿수 늘리기, 혼자 볶음밥 완성하기, 나무 키워서 열매 얻기였다. 첫 리스트를 읽자마자 엄마들의 옅은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졌다. 신선함에 나도 '풉'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집을 나서기 전에 머리 빗는건 까먹어도 물고기 밥주는 건 잊지 않는다. 화분에 물을 주는 것도 후니 몫이다. 무언가를 키우고 열매를 얻고 요리 하는 걸 좋아하는 아이다. ‘아이에게 무언가 정말 좋아하는 게 없지 않을까' 생각했던 몇 분 전 내가 머쓱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대신 빌딩 사이 정겨운 오두막 한 채가 떠올랐다.

 

제작년이었나, 꿈이 요리사라고 했다. 집에 친구를 데려와 계란 후라이를 해서 밥에 얹어주었던 그 즈음이었을 거다. 한번도 불을 써본 적이 없었는데 계란을 네 개씩 부쳐 나눠먹고 돌아가는 친구 손에 초콜렛을 쥐어 보냈던 일이 떠올랐다.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대접하는 아이의 10년 후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요리사가 친절을 실천하는 직업이라는 생소한 생각이 지나갔다. 소젖을 짜고 감귤을 따 듯 신선한 재료들을 고르고 조합하여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일이 아이에게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떤 행복을 주는지, 그 가치를 전해주는 요리사라는 직업이 새롭게 다가왔다.

 

나는 어릴 때 꿈을 묻는 게 참 막막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갑갑하기도 했던 것 같다. 가끔 너 뭐 하고 싶냐고 묻는 이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어른이 아이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묻지 않는 이유는 그들도 그렇게 질문하기를 잊었기 때문인 것 같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도 버거운데 미래를 그린다는 건 사치처럼 느껴진다. 더 이상 무엇을 원하는지 자문하지 않는 게 세상에 적응하고 살아가는 효율적인 태도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이의 버킷리스트를 들으며 도심 속 오두막을 그려보던 순간에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날 '엄마~'하고 신나게 대문을 들어오는 아이에게 물었다.

"훈아~주말에 뭐 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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