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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안솔 Nov 10. 2023

잠수이별

이게 말로만 듣던 잠수이별인거지?

잠수 직전.

약속시간 두 시간 전에 문자가 온다. 곧 보자는 그의 문자겠거니 추측하고 준비를 마치고 나서야 확인한다. 그에게서 온 문자는 맞는데 곧 보자는 내용은 아니다.


‘OO아 미안해. 오늘 약속 미뤄야 할 거 같아. 검사 결과가 안 좋아서 추가 검사 해야 한대. 끝나고 연락할게.’


‘응. 끝나고 연락해.’

답장을 보내고 나서 오늘 약속을 미루자는 게 약속 시간을 미루자는 건지, 오늘 못 보니까 다른 날 보자는 건지 확실치 않아 일단 기다려본다.


잠수 두 시간 후.

저녁식사 시간이 다 되도록 그에게 연락이 없는 걸 보니 오늘 못 만난다는 거였나 보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허겁지겁 저녁을 먹는다.


잠수 네 시간 후.

끝나고 연락하겠다는 그는 병원 진료 시간이 다 끝나도록 연락이 없다. 검사 결과가 많이 안 좋나 걱정이 된다. 결과가 안 좋아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데 내가 부담을 줄까 봐 그의 연락을 그냥 기다린다. 기다리다 더는 못 참고 문자를 한다.


‘검사 잘 받았어?’


잠수 당일 밤.

처음 몇 시간은 그의 건강과 안전이 걱정됐는데 밤까지 연락 없는 게 좀 황당하다. 뭐 하자는 거지? 그의 무책임한 태도에 조금 화가 난다. 내일 뭐라고 변명하는지 두고 보자 하는 심정으로 잠을 청한다.


잠수 이튿날 오전 7시.

7시 알람에 눈을 뜬다. 밤사이 그가 어떤 변명을 고안해 냈는지 기대에 차서 문자를 확인한다. 이럴 수가. 그에게서 답장이 없다. 심지어 그는 내 문자를 확인하지도 않았다.


잠수 이튿날 오전 11시.

그가 드디어 내 문자를 읽었다. 별 내용이 아니라 그가 문자 내용을 안 게 중요한 건 아니고 그가 내 문자를 읽었다는 사실을 이 시점에서 내가 안다는 게 중요한 거지. 이제 어떻게 할 건데?  


잠수 이튿날 점심.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게 말로만 듣던 잠수 이별인가 싶다. 잠수 이별을 처음 경험한 나는 점심시간을 반납하고 유튜브에 ‘잠수이별 대처법’을 검색해 본다. 쓰레기니 빨리 치워야 한다는 조언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헤어졌다고 간주하고 무응답으로 대응하는 게 정석이라는 가르침이 제일 마음에 든다. 그렇게 해야겠다.


잠수 사흗날 오전 7시.

어제까지만 해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갚음해 주리라 하고 의지를 불태웠는데  맑은 정신으로 아침을 맞이하니 생각이 좀 달라진다. 나이가 마흔이 다 돼서 이별하는데 헤어지자는 말도 없이 이렇게 돌아서는 게 너무 유치하다. 그러다 그에게 유일하게 복수하는 길은 그가 내 인생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 것처럼 싹 무시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는다.


잠수 사흗날 오후 7시.

그를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지만 하루 종일 이 생각뿐이다. 분노와 복수심, 거기에 결론 없는 이 애매한 상태까지 더해져 마음이 왔다 갔다 지옥이다. 그래. 그냥 인정하자. 나는 클로저가 필요한 사람이다. 이별을 고하는 수고까지 감당하기 싫었던 그를 대신해 우리 관계를 내가 정리해야겠다. 그에게 마지막 문자를 보낸다.


‘이게 말로만 듣던 잠수이별인 거지? 답장 없으면 눈치껏 알아들어야 되는데 내가 쿨하지 못해서 시작이 필요한 것처럼 끝이 필요하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게 오빠 뜻이면 존중해야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 옆에 있어줘서 고마웠어. 잘 지내.’


아 이제야 마음이 후련하다. 끝이다. 착한 줄 알았던 그는 알고 보니 문제가 생기면 회피해 버리고, 무책임하며, 이별을 고하는 최소한의 예의도 없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그가 빨리 본모습을 보여줘서 오히려 고맙다. 이런 쓰레기를 얼마나 더 만나야 되는 거야? 인생 참 팍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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