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으리, 이름의 기원
친부가 남겨준 유일한 유산
어렸을 때 동네 어르신들은 나를 "으리야."라고 불렀다. 생물학적 친부의 성이 안 씨였는데 자기 딸에게 지어줄 이름을 '안으리'라고 지었다고 한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안아주기를 바란다는 뜻이 담긴, 의미 있고 흔치 않은 이름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 이름을 남긴 사람은 나를 품어주지 못했다. 아니, 품어주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친딸을 키우지 못할 정도의 사정이라고 하면 그에게 가정이 따로 있고, 본처도 있었다는 것 정도? 그런 그가 당당하게 외도를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본처가 불임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드라마에 나올 법한 이야기는 아이를 갖고 싶었던 그가 아이를 얻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엄마에게 접근하면서 시작된다. 미혼모의 몸으로 아이를 키우긴 힘들 것이니 아이를 낳으면 저에게 줄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다르게 엄마는 나를 절대로 줄 수 없다고 했고, 둘 사이의 협상은 결렬될 수밖에 없었다. 친부는 아이를 주지 않으면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으나, 그 또한 이미 나를 키우기로 마음먹은 엄마의 의지를 꺾을 순 없었다. 그렇게 엄마는 미혼모의 몸으로 나를 낳았다.
지금이야 미혼모가 꽤 흔하지만, 당시에 시골에서 미혼모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건 미혼모의 딸로 살았던 내가 안다. 아이들의 입은 솔직해서 아빠 없는 아이를 향한 거침없는 말들은 어린 시절 내 마음에 생채기를 남겼으니까. 엄마는 나보다 더 오랜 기간 그 모진 시선과 말을 견뎌왔을 테니 그 상처가 오죽 크셨을까.
그래서 어린 시절 내 꿈은 큰 사람이 되는 거였다. 훌륭한 어른이 돼서 나를 키우며 고생만 하신 엄마와 외할머니께 보답하고 싶었다. 사실 그것보다 더 절실했던 마음은 보란 듯이 성공해서 나를 버린 친부가 자신의 선택을 뼈저리게 후회했으면 하는 거였다. 시골 학교에서 공부도 제법 잘하고 글쓰기에 두각을 보였던 나는 커서 유명한 작가가 되리란 꿈을 가졌다.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나는 더 큰 세상을 만나며 나의 재능이 얼마나 하찮은 것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나보다 공부도 잘하고, 글도 잘 쓰는 친구들을 알게 되면서 내 꿈은 산산이 깨어졌다. 그토록 유약한 꿈이었음에... 꿈을 포기한 나는 성적에 맞춰 취업이 잘 된다는 과에 들어가 남들 할 때쯤 취업을 하고, 남들보다 조금 이른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사는 그저 그런 어른이 되었다.
가끔 생각한다. 내 한계를 알았을 때 쉽게 포기하기보다 더 잘하려고 노력해 봤으면 어땠을까? 남들이 비웃을 꿈일지언정 계속 품고 그 길을 갔더라면 어땠을까? 유명한 작가는 못 되었어도, 지금쯤 글 쓰는 일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피지도 못하고 져버린 나의 어린 꿈, 그건 세상 사람들이 다 안아주기를 바란다는 뜻을 가졌지만, 그 이름을 지어준 아버지에게마저 버림받은 '안으리'란 이름을 가진 이의 숙명 같기도 하다.
안으리, 지금은 아무도 부르지 않는 어릴 적 아명을 지금에 와서 꺼내든 이유는 이대로 늙어 죽고 싶지 않은 나의 절규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평범하게 살다가 죽을 수도 있지만, 여전히 나는 마음 속 깊이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안아줬으면 하는 건 내가 결코 이룰 수 없는 바람, 그렇지만 반대로 내가 다른 사람들을 안아줄 수 있지 않을까? (그것 또한 욕심일지도 모르지만.) 모자란 나의 글로나마 나와 비슷하게 상처 입은 이들을 위로해주고 싶다. 그것이 내가 안으리란 이름으로 이렇게 글을 쓰게 된 이유다. 이 이름으로 유명해져서 친부가 보게 됐으면 하는, 어린 마음도 한 스푼.